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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칼럼은 지난 달 칼럼 “혼전 성관계에 대한 오해와 진실” 후속 편이다. 혼전 성관계에 대한 진실을 올바르게 인식했다면, 이제는 이미 혼전 성관계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필요할 것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는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즉 “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한 바른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 "사랑하기에... 유혹적인 환경에서 실수로... 잘못인지 알지만 그 사람의 요구가 너무 강하고 거절하면 떠날 것 같아서... 결혼을 약속하였기에 조금 일찍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아서... 몸을 함께 했습니다"가 아니다. 단순하지만 명백하게 “하나님 앞에 간음죄를 범했습니다”라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여야 할 것이다.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십계명을 비롯하여 구약과 신약 구석구석에서 죄로 선포하고 있다.

간음죄를 비롯하여 여러 죄악들을 행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엡4:18-19)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치대로 자기 성격대로 말씀을 해석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믿는다. 다음 단계는 마음이 굳어진다. 이렇게 굳어진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만들며 영적인 감각을 잃게 한다. 결국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모든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fear and respect)하지 않았음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대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았음을 먼저 철저히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악한 길, 불의한 생각 가운데 있지 말고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으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신다.(사55:7, 시103, 요일1:9)

두 번째는 혼전 성관계를 가지게 된 원인을 분석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약점을 고치고 보완하여 또다시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원인으로 내실 있는 이성교제가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부족했는지(이성교제가 서로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며 건전하고 성숙한 관계가 되도록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자의 지나친 노출 패션이 남자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지 않았는지, 만나는 장소가 은밀하거나 고립되어 있어 유혹적이지는 않았는지, 자기조절능력이 부족한 성격적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섬세하고 예민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다시는 제공하지 않도록 한다.

세 번째는 성 에너지 관리를 위해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며 야한 동영상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하에 폭력적이고 음란한 게임을 즐기며 심지어 사이버 섹스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만드는 일이다. 운동과 자연을 많이 접하는 산책은 우리의 정신건강을 좋게 하며 성 에너지도 건전하게 관리해 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란물에 중독되어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영적 싸움으로 단정하고 그저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 소리만 높이 부르짖고 돌아서면 다시 음란물을 접한다. 그러고는 사단이 너무 강하여 자신은 무기력하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며 자포자기이다. 혹은 자기 조상의 죄 때문에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다며 묶는 기도, 끊는 기도에 몰두한다. 사람들이 이런 식의 접근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옳지 않은 행위를 사단이나 조상에게 책임전가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교리이다.

창조주, 만왕의 왕,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승리하셨으며 사단에게 전혀 영향 받지 않으신다.(욥1:6-7; 엡1:10-13, 20-22, 6:10-20; 야4:6-8; 벧전5:8-9...) 또한 아들이 부모의 죄악을 담당하지 않는다.(렘31:29-30, 겔18:20) 오히려 사단은 우리가 자기관리에 소홀하여 실수할 때 그 실수를 가지고 우는 사자처럼 삼키려 덤벼든다.(벧전5:8 ‘근신하라’는 영어로 ‘Be self-controlled'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단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통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또한 믿음을 가지고 진리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삶이다.(엡6:14-17)

야하고 음란한 것들을 피하고 운동과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는 자기관리가 성적인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네 번째는 매일 주님께 자신의 약점을 내어 놓고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기를 관리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다. 물론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버리기 위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인내해야 하는 우리의 몫이 있으나(히12장),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시다.(대하16:9) 더욱이 주님의 가르침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려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넉넉하리라 믿는다.(고후7:1, 롬8:37)

하나님의 법도대로 결혼을 통한 부부관계 속에서 떳떳하고 자유롭게 성관계를 즐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매우 놀라운 축복이다. 하지만 혼전 성관계를 이미 가진 사람들도 철저한 회개와 위에 언급된 회복의 과정들을 온전히 거침으로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 구세주(Savior)이시며, 동시에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우리 인생의 주인(Lord)이 되신다. Praise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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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혼전 성관계에 대한 여러 설문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2009년 알바천국 ‘성의식’ 설문조사에 의하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이 성관계 경험이 있고 그중 70%가 만난 지 한 달 이내 성관계를 가졌다. 2009년 학원 복음화 협의회 ‘전국 대학생의식 조사’에 의하면 10명 중 6명이 성관계를 경험하였고 기독대학생중 23.9%가 ‘혼전성관계 가능’이라고 답했다. 또한 2009년 죠이선교회 ‘대학생들의 성의식 조사’ 결과는 혼전성관계 ‘필요하다’가 67%이다. 동거 ‘반대’는 23%로 77%가 동거를 찬성하거나 인정한다. 또한 2010년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 없어서 못 판 품목이 김밥, 치킨, 그리고 콘돔이라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베이비’라는 신종어도 있다.

이런 현실 앞에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느낀다. 위의 언급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집단만의 통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 젊은이들도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고 있다.(엡4:18-19)

혼전 성관계의 명분은 이러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사랑을 마음껏 표현해 주고 싶다!’고 말한다. 혹 ‘결혼 후 떳떳하게 성관계를 가지자’는 여자의 반응에는 ‘넌 날 못 믿니?’라고 따지기까지 한다. 여자는 거절하면 남자를 끝내 믿지 못한다는 말로 여기고 남자가 화를 내거나 돌아설까 두려워 그저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만약 여자가 성관계를 거절했기 때문에 떠날 남자라면 진작 보내는 것이 낫다. 그런 남자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 더욱이 평생을 믿고 삶을 나누기에는 너무나 불안하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널 믿지! 그리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다 알지. 하지만 우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떳떳한 사랑을 나눌 때 까지 참자!”라고 말하며 빨리 밝고 사람 많은 곳으로 나와야 한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은 야한 옷차림과 향수, 야릇한 몸짓으로 오히려 남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 동기와 목적을 모두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절제할 수 없는 성 충동’ 때문이다. 남자는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여자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 또한 한번 성관계를 가진 여자에 대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육체적 욕구만 채우려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녀 관계는 성관계를 가지기 전과 가진 후가 정반대로 변한다. 성관계를 가지기 전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열애해왔지만, 성관계 후에는 여자가 남자를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는 격이 된다. 왜냐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매력을 잃고 오히려 그녀를 헤픈 여자로 우습게보지만, 여자는 이미 몸을 주었기에 이 사람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불안한 생각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적극적이 된다. 그럴수록 남자는 여자가 귀찮아지고 짜증이 나며 슬그머니 관계를 끊는다. 실제로 혼전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결혼할 확률은 매우 낮다. 1달 이내 헤어질 확률이 21%, 1년 이내 헤어질 확률은 81%라고 한다. 결국 사랑은 깨어지고 서로가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혼전 성관계로 인한 결과는 이뿐 아니다. 남자 여자 모두에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여자의 경우 더 심각한 아픔을 겪는다. 첫째, 자존감이 낮아지고 내면이 불안정해 진다. 도덕성은 자존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존중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전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늘 잔잔한 불안감 속에 우울해지기 쉽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어렵다.

둘째, 그들의 만남이 인격적인 만남이 아닌 욕구 충족에만 급급한 만남이 되기 쉽다. 서로를 알아가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전인격적 친밀감을 충족하고 서로를 성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임신의 가능성과 낙태의 위험이다. 혼전 성관계는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임신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낙태를 한다면 이는 살인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생명체가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 낙태를 한 사람들은 불임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낙태 시 자궁벽을 긁어내는 작업은 후에 정자와 난자가 착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혹 임신하여도 유산의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만약 결혼한다하여도 서로에 대한 존중감과 신뢰도가 낮다. 이것은 혼전 성관계 경험자가 그렇지 않은 부부의 이혼율보다 3배 높다는 연구 결과에도 나타난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로는 혼전 성관계를 가진 자의 특징이 관습에 덜 메이고 약속이나 언약을 적게 하며 그것을 지킬 개인적인 능력도 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다툼과 불화를 일으키며 폭력과 음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며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감정적이며 책임감과 자기조절 능력이 약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과 계산할 날이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게 되어있다. 특별히 혼전 성관계, 즉 간음(십계명 중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에서 간음은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매우 엄하게 책망하시고 경고하심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고후5:9-10, 고전6:9-10, 갈5:16-21, 골3:5-6, 데전4:1-5, 야4:4, 벧전1:15-17, 계2:19-23). 이것이야 말로 혼전 성관계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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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타 2010/06/20 21:23  Addr Edit/Del Reply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관계를 이미 경험한 젊은 이들에 대한 전언을 듣고 싶습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 또는 여러 이유로 이미 성경험을 한 젊은 이들이 이제부터 어떻게 순결함을 지켜야 할지에 대한 내용의 칼럼을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사랑 특별히 연인들의 사랑이나 부부의 사랑에 대해 논할 때, 사람들은 사랑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종종 본다. 너무나 당연하게 “사랑은 이런 것이야”라고 정의 내리고 그냥 그 정의를 믿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관계들을 오해나 곤경에 빠지게 하는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사랑은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내 의지로 컨트롤되지 않는 그 어떤 것으로 감정에 바탕을 둔 로맨스라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마구 솟아오르는데 나도 그 마음을 어떻게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커 그냥 그 감정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감정적인 열정으로 사랑에 빠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며 무책임하게 뒤돌아서버린다. 그간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때는 사랑했으나, 지금은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라는 답만 돌아올 뿐이다. 심지어 육체적인 관계를 가졌음에도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돌아선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잘못된 정의다. 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사랑을 정의내리는 것은 자신의 감정적이고 현명하지 않은 처신을 합리화 하는 것으로 책임 없이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부추기는 격이 된다.

하지만 사랑은 통제 가능한 것이고 책임이 따른다. 즉 사랑은 절제와 책임을 포함한다. 절제와 책임이 따르는 사랑은 자신에게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으며, 오히려 성숙하고 생산적인 관계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둘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나 감정 심지어 욕구까지 무엇인지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상대방이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하게 행동하거나, 혹은 내 욕구가 무엇인지 몰라 눈치보고 있다면 우리는 쉽게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화를 낸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한다하여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상대방에게 표현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특별히 여자들의 경우 굳이 말로 그것을 표현해야 하느냐며 스스로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 상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이고도 잘못된 기대이다. 가정상담 전문가들은 부부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되는데는 대략 27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물론 투명하고 성숙한 의사소통을 하는 부부라면 시간이 좀 더 단축되겠지만,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감정까지 알 수 있는 친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로 연합하기 위한 노력에 헌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노력을 하는데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셋째, 사랑하면 서로의 생각이 늘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이 같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생각이 다르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갈등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해도 생각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 MBTI 성격검사에 의하면 16가지의 성격유형이 나온다. 이는 내 성격은 단지 1/16에 불과하며, 나와 다른 성격의 유형이 15가지나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만약 상대방이 모든 일에 늘 나와 생각이 같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사회부적응이다.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면 평생 불만족과 불평, 그리고 갈등과 분노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랑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당신이 더욱 필요함을 고백하게 된다. 나와 남편은 서로 반대되는 성격이다. 나는 예민한 편이고 남편은 둔한 편이다. 나는 남편 덕분에 안정감과 여유를 배우게 되고 남편은 나로 인해 섬세함과 배려를 배운다. 나는 곱창전골과 돼지족발과 도가니를 좋아하지만 남편은 순 살코기를 좋아한다. 남편은 나에게 “무슨 여자가 술안주 감을 좋아하느냐?” 비난할 수 있고, 나는 “무슨 남자가 음식을 여자처럼 가리냐?”고 불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닭 한 마리 사면 남는 것이 없다. 나는 닭의 날개와 연골을 먹고 남편은 퍽퍽한 흰살을 먹는다. 매우 경제적이다. 서로의 다름이 복으로 인정되는 순간이 많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한계가 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고백하였다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일관된 사랑의 감정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영원한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일 뿐이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지난 24년의 결혼생활을 뒤돌아보면 큰 갈등이나 다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성격이나 관점의 차이로 서로 답답하기도 했고,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한때 중년 권태기로 무미건조한 시간을 보낸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때 마다 우리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엎드려 사랑을 구했고 그분은 풍성한 사랑을 늘 공급해 주셨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사랑이 없을 때 곧바로 영원한 사랑의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는다.

사랑에 대한 잘못된 오해는 사랑의 관계를 해친다. 그러므로 사랑 가운데 있거나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정의가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건강한 것인지 건강하지 않은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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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결혼을 위한 준비는 결혼할 대상이 있고 결혼날짜를 잡으면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결혼준비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들은 결혼식을 위한 준비에는 많은 돈을 들이고 계획을 세우며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정작 진짜 해야 할 결혼준비에는 너무나 소홀 한 것을 본다. 그 결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가정들이 깨어지고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결혼준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을 안정감 있고, 책임감이 있으며, 진실한 사람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먼저 안정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안정감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며 외부환경의 변화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다. 반대로 안정감이 없는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대안이 없는 충동적인 일을 벌이며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기 쉽다. 또한 상황과 기분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일관성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만약 남편이 안정감이 없어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쉽게 옮겨 다니거나 혹은 이 일 저 일을 마구 벌이고 수습하지 못한다면 가정은 매우 불안할 것이다. 또한 아내가 불안정하여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할 경우 이는 교육전문가들에 의하면 자녀들에게 가장 좋지 않은 교육환경이 된다. 그러므로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분명히 할 뿐 아니라 깊이 있고 신중하게 사고하며 감정과 행동을 절제하는 훈련을 하여야 할 것이다.

책임감도 결혼준비를 위해 중요하다. 혼자 독신으로 산다면 부담 없이 자신이 원하고 즐기는 일만 선택하여도 크게 문제되지 않겠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하기 싫어도 힘이 들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그것이 버겁고 억울하게 생각된다면 결혼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특별히 여러 책임감 중에서도 돈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이혼하는 부부들의 실제 이혼 사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외도와 경제 문제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남편이나 아내 중 어느 한쪽이라도 돈을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규모 없이 함부로 쓰거나 원하는 것은 일단 카드로 긁고 보는 것이 습관이라면 결혼 후 얼마가지 못하여 가정경제의 뿌리가 크게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수입과 분수에 맞는 씀씀이와 부족할 경우 일을 통한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수입원으로 하는 책임 있는 재정관리가 연습되어져야 할 것이다. 나 자신도 결혼을 앞두고 가계부를 기록하며 돈을 아껴 쓰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그 당시 나는 급하면 택시 타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을 절제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었다. 결혼 후에도 가계부를 기록하며 수입 범위 안에서 각 항목 별 예산을 세워 그에 맞게 지출하였는데 20년 동안 그렇게 하였고 지금은 몸에 밴 습관으로 가계부 없이 생활한다.

마지막으로 진실성이다. 진실성은 부부관계에 있어서 신뢰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거짓이 없이 투명하게 서로를 대하며, 돈이나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속이지 아니하고, 이성과의 만남에 있어서 오해가 살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진실성을 믿지 못하게 될 때 몰래 반려자의 핸드폰을 확인하거나 주머니를 뒤지게 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거짓말과 대화단절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두 가지가 부부갈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므로 정직한 언어와 마음으로 하는 진실한 커뮤니케이션은 결혼을 위해 평소에도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외에 특별히 자매들에게 몇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상냥함과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이다. 가정의 분위기는 아내가 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밝은 모습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는 가족들을 환영하며 그들이 가정에서 쉬고 에너지를 충전하도록 기본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좋겠다. 또한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하기 때문에 눈치 없고 둔한 남성들의 행동에 만족하기가 어렵다. 뭔가 부족하고 섭섭하며 아쉽고 속이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잘난 우리 여자들이 너그럽게 이해하고 참읍시다!” 희생정신에 있어서도 그렇다. 아무리 남성들이 도와준다고 하여도 여전히 가사 일은 여성의 부담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지런하고 희생할 줄 알며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면 결혼생활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반려자가 없어도 결혼 준비는 가능하다. 오히려 행복한 결혼을 위해 더 든든한 기초를 다지는 좋은 준비 기간이 될 것이다. 안정감, 책임감, 진실함, 상냥함, 이해심, 그리고 희생정신... 이러한 것들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위한 진정한 결혼준비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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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쿠우 2010/07/14 21:15  Addr Edit/Del Reply

    마음에 새겨야겠군요~~^^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시고 기대하시는 중요한 주제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늘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어서 사랑을 마음껏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의 공동체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목사님의 설교나 좋은 책들, 또한 구역이나 셀 모임에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였건만 여전히 우리들에게는 풀리지 않는 숙제들이 남아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국 교회는 지난 이십여 년 동안 기독교 상담의 좋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리하여 공동체 가운데 자기를 개방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며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고 또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결여된 것이 있다. 바로 ‘신뢰성(faithfulness)’에 대한 문제이다. 신뢰성은 믿을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는 타인의 믿음으로, 공동체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어느 공동체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섬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이간질 하거나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욱이 얌체처럼 말만 잘하고 이기적으로 자기의 실속만 차리며 져야할 공동체적 책임을 회피한다면 과연 그들이 깊이 있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신뢰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공동체는 시간이 가면 무너진다. 처음에 서로 잘해 줌으로 친밀한 모양새를 갖출 수는 있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곧 갈등과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신뢰성이란 무엇일까? 수업시간에 신학생들과 ‘신뢰할 만한 사람’의 특징에 대해 토론했는데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정직한 사람, 겉과 속이 같은 사람, 비밀을 지키는 사람,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람, 성실한 사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고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 자기의 분수를 아는 사람, 옳은 일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뒤에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 자기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해롭게 하지 않는 사람, 겸손한 사람,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 모두 맞는 말 이다.

성경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신뢰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뢰성 중에서도 특별히 정직, 성실, 진실은 으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정직은 구체적으로 돈에 대한 정직과 말에 있어서의 정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돈에 대한 정직은 내 돈과 남의 돈을 구분하는데서 출발한다. 비록 남의 돈을 훔치거나 사기 치지는 않을지라도 공금을 개인 돈처럼 사용하거나, 마땅히 내야 하는 세금을 편법이나 여러 가지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내지 않는다면 정직하지 않는 것이다. 말에 있어서도 사실이 아닌 말을 하거나 혹은 내용을 빼거나 덧붙임으로 나의 목적을 위하여 본말을 왜곡시킨다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 아들이 운전면허를 딴 후 몰래 아빠의 차를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들켰는데, 그 후 언어의 정직을 스스로 훈련하면서 깨달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었다. “엄마, 정직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것 같아요.” 언어를 정직하게 사용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언어에 정직하지 않았는지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2)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도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중요한 덕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실함의 수준을 “사람을 의식하여 행하는 눈가림질”에서 “무슨 일을 하든 주를 두려워하여 주께 하듯”의 수준으로 올려놓으셨다.(골3:22-24)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식하며 성실히 행하는 자의 자유함을 나도 평생 누리고 싶다.

진실은 거짓이 없이 참되고 말과 행동이 같은 것을 의미한다. 수년 전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 강의를 하였는데 그날이 찬양을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유학을 위해 마지막으로 섬기시는 날이었다. 그 목사님이 찬양인도를 마무리하면서 교인들에게 작별인사하신 내용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찬양을 인도하면서 진실치 않았던 때가 너무나 많았음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까지 찬양을 하며 많은 멘트를 했지만, 솔직히 제가 멘트 한 내용의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것이 너무 괴로워 눈을 감고 찬양을 하기도 했고... 그래서 20분이 2시간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진실을 향하는 그의 간증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진실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며 따르고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연약한 공동체를 세우며 나아가 그것을 사랑과 성숙한 공동체로 만든다. 하지만 돈이나 말에 정직하지 않고 맡은 일에 무책임하며 진실치 않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깨트리고 무너트린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서로 용납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도 매우 시급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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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찬양을 통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경배함으로 우리의 사랑을 올려드리기도 하고, 깊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고 넓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도 더 깊고 넓어지는 것 같다. 찬양과 기도를 통한 마음의 고백뿐 아니라, 삶 가운데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려는 나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증명”할 수 있기도 하다.

마음으로 하는 고백이다. 대학 졸업반 때의 일이다. 평소에도 우리 가정은 부모님의 불화와 장애를 가진 동생으로 인한 어려움이 늘 있어왔지만, 그때는 중요하고 심각한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겹쳐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절절히 느끼던 때였다. 평생을 공무원으로 곧은 성품대로 성실하게 일하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억울하게 그만두시는 일이 생겼다(이것은 그 당시 국가적인 사건으로 후에 명예회복이 되셨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으로 과외를 하며 용돈을 벌던 어느 날 정부에서 ‘대학생 과외 금지 조치’를 내렸다. 졸업 후 특수학교 교사로 A 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그 학교가 타종교 재단임을 후에 발견하고 포기하였다. 장래가 막막했다. 결혼한 언니가 가정불화로 친정집에 와서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였다. 임신 8개월이었다. 결혼을 생각조차 않던 나에게 사랑한다며 결혼하고 싶다고 하던 형제가, 내가 마음을 결정하기도 전에 다른 자매와 만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믿을 남자가 없었고 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큰 산이 사방에서 무너지는 것 같았고, 소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데 도대체 집안 일이 왜 이렇게 안 되냐는 믿지 않는 부모님의 핍박은 갈수록 더해 갔다. 주일날 교회도 다니지 못하게 했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느껴졌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을 주님 앞에 울며 마음껏 토로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씩 감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어주심 감사, 사방이 막히어도 내 눈을 하늘로 들 수 있도록 “거기 계신 하나님”께 감사... 그리고 그분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였다. “여기서 또 어려움이 생긴다 하여도, 나를 구원하기 위해 생명까지 버리신 주님은 결코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어려움이 해결되는 복 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가장 큰 복임을 선택하고 사랑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마음으로 하는 고백 뿐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모든 짐을 가지고 올 때의 일이다. 대부분의 유학생이 그렇듯이 우리도 짐이 별로 없었다. 냉장고나 세탁기 등 가구는 전혀 없었고 옷가지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컴퓨터와 프린터가 2개 씩 있었다. 처음에 유학 가서 구입한 것과 졸업논문을 쓰면서 좋은 것으로 구입한 컴퓨터와 프린터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삿짐 회사 직원이 말하기를 한 가지 물품이 여러 개 있으면 좋은 것에 세금을 부과하는데 우리 경우 100만 원 정도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리에게는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방 두 칸 얻을 정도의 금액인 천만 원과 급한 대로 냉장고와 세탁기 사라고 친정어머니가 주신 백만 원이 고작이었다. 아까웠다. 그런데 회사 직원이 좋은(?) 제안을 하였다. 세관원에게 20만원만 주면 무사통과라는 것이다(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갈등이 생겼다. 하지만 남편은 단호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한 번도 하나님 때문에 부끄러움을 겪은 적이 없었는데,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세관원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지만 양심에 비추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이었다. 세관원 아저씨에게 푼수처럼 떠들어댔다. “아저씨, 저희는 컴퓨터가 두 대고 프린터가 두 대예요. 여기 있고, 저~기 있네요. 세금 얼마예요?”

마음도 달라졌다. “하나님, 세탁기가 없어 손으로 빨래를 빨 때 마다 주님을 기억할 것이며 아이스박스에서 김치를 꺼낼 때 마다 주님을 기억할 거예요. 저, 기본은 되었지요? 저 때문에 하나님 창피하게 만들지 않았지요? 주님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가는 것은 찬양과 기도로 고백하는 사랑보다 더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도 평생 마음으로, 또한 삶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것이 진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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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ng eun 2010/02/04 03:49  Addr Edit/Del Reply

    가정의 힘든 문제로 주님께 기도 하였을때 정말 연약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말씀으로 그분은 응답하셨습니다. 물론 그 말씀뒤의 구절에 엄청난 축복에 말씀도 함께 주셨지만 그말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응답 받은 뒤로 갈등과 중압감으로 잠도 잘수 없고 오히려 어떻게 힘든 우리 가정에 이런 응답을 주시는지 원망까지 들기 시작했지요..자매님 글을 우연히 읽고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저의 눈이, 마음이 다시 열리는듯 합니다. 자매님께서 마음으로, 삶으로 하셨던 고백이 제게도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아 맞다!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야!

    마음으로 쓰신 글 감사합니다.

은호(가명)는 나와 같은 교회에 다녔던 장애우 형제이다. 지금은 은호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평강 가운데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은호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장애우를 섬기시는 강 목사님과 함께 방문했을 때이다. 그 당시 강 목사님과 나는 일주일에 한번 장애우들을 찾아 심방했었다. 강 목사님과 함께 은호 집을 방문했을 때 오래된 주택에 대문은 열려 있었고 은호는 집에 혼자 있었다. 도둑이 들어도 가져갈 물건이 없었겠지만 은호가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아예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은호는 근육병을 앓고 있었다. 근육병은 처음에는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다가 점차 몸 위로 올라가면서 근육에 힘이 빠지면서 진행되는 병으로 진행성근마비라고도 부른다. 심한 근육병 환자들은 똑바로 앉아있지를 못하고 엎드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은호가 그랬다. 은호는 거의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을 절단하시고 치료 중이셨기에 어머니는 병원을 오가며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수발하셔야 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깝게도 어머니 또한 다리 한쪽이 불편한 지체 장애셨다.

은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밝은 성격 덕분에 우리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은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강 목사님은 긴 널빤지를 망치와 못으로 뚝딱이며 근육병인 은호가 휠체어를 탈 수 있도록 목수 일을 하고 계셨다. 은호를 교회에 나오게 하기 위해 엎드려 지내는 은호가 탈만한 휠체어를 만들고자 목사님이 아이디어를 짜 낸 것이었다.

드디어 은호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다! 수년 만에 첫 외출인 것이다. 휠체어 바닥에 긴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엎드려 있었고 교회 신실한 형제가 안전하게 휠체어를 운전하였다. 마음 따뜻하고 헌신적이신 강 목사님의 섬김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처음에 약간 낯가림하던 은호도 성도들의 환영과 친절함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나중에는 아예 오래된 식구처럼 우리와 하나가 되어졌다.

어느 날 몇몇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 하며 교제하다가 은호가 “저는 평생 바다에 한 번도 못 가봤어요.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TV 통해 보았을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모두들 놀라며 “이번 여름에 은호에게 바다 구경시켜주자!”라고 뜻을 모았고 아예 장애인위원회 여름 캠프를 강원도 옥계로 정하였다. 그해 여름, 드디어 수십 명의 장애우와 수십 명의 봉사자들이 은호에게 바다구경 시켜주기 위해 대장정에 나섰다.

바다가 가까운 옥계 어느 교회를 숙소로 하여 우리 모두는 3박4일 동안 드넓은 바다, 해지는 저녁, 맛있는 음식, 가족 같은 친밀한 교제 등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즐겼다. 특별히 장애우 형제자매들을 한명씩 모두 조심스럽게 바닷물에 몸을 담구어 주었을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던 놀라움과 감격의 탄성, 모래사장에서 휠체어 밀기가 너무 힘들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즐거워 함박웃음 짓던 일, 예수님을 영접한 형제자매에게 하얀 침례복을 입힌 후 고무 튜브 위에 눕혀 건장한 청년 봉사자들의 호위 속에 서서히 바다 속으로 들어가 침례 주던 일, 이때 행여 파도가 밀려올까 몸으로 인의 장막 만들고 울타리 섰던 일...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들이었다.

특별히 모래사장에서 휠체어에 엎드린 채 바다를 바라보며 은호가 한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사모님! 어떻게 저 많은 물들이 땅을 삼키지 않지요? 너무너무 신기해요! 하나님 대단하셔요. 정말 창조주 하나님이세요.” 은호의 말에 오히려 놀란 사람은 바로 나였다.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은호에게는 만유의 주재,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감격스럽게 체험하는 사건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후에 시편 104편 9절에서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섬세하신 창조의 계획이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 명을 위해 수십 명의 형제자매들이 사랑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한편의 드라마였지만, 그 드라마의 엑스트라로 섬기고 온 봉사자들에게도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 더 깊고 넓은 깨달음과 교훈을 얻은 유익한 캠프였다. 나와 함께 참여한 아들(그 당시 초등학교 4학년)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학 숙제로 낸 글짓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목은 “사람의 아름다움”이다.

이번 여름방학 때 어머니와 함께 장애인 캠프에 갔다. 그저 봉사하자는 마음으로 갔었는데 오히려 많이 즐겁게 지내고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누구나 한 가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뇌성마비 우철 형아의 눈은 누구도 비길 자 없을 정도로 눈이 맑고 아름다웠다... 시작부터 끝까지 웃음과 미소를 띈 경훈 형아는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웠다... 갈매기와 파도소리가 우리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꿈만 같은 여름 캠프를 마치고 돌아 온 후, 그해 가을의 문턱에서 은호는 조용히 주님 곁으로 갔다. 넓고 푸른 바다, 그 바다가 땅을 덮지 못함을 보고 놀라움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은호... 그는 드디어 이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눈으로 뵈오며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그분께 마음껏 올려드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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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은 어린아이에서 시작하여 어른에 이르기까지 늘 따라다니는 신앙의 중요한 이슈이다. 낮은 자존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상처는 가족 및 여러 관계에서 일어난 아픔이 원인이 된다. 또한 상처의 치료방법으로 강조되는 내적치유는 주로 상담과 기도에 의존한다. 모두 의미 있는 접근이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의 원인에는 상처만 있는 것이 아니며, 자존감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상담과 기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중요한 요소들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자존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상처와 내적치유만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상처와 내적치유를 각각 한손에 부여잡은 채 여전히 자신의 문제 속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진보, 인격의 성숙, 이웃을 향한 적극적인 섬김을 이룰 내적 에너지와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자존감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도덕성, 문제해결능력, 그리고 사랑의 삶이다. 이 세 가지는 자아개념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상처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지만 위의 세 가지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것들이 된다.

첫째로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시고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강조하고 “아멘”이라 화답한다 할지라도,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거나 포르노 컴퓨터에 중독이 되어 있고 혹은 돈에 있어서 투명하지 않다면 그 사람의 자존감은 결코 높아질 수 없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가치를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해도 머리에 겉돌 뿐, 그런 행동을 그치기 전에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이 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들이 불륜을 가진 우울증 환자들을 위해 순결요법을 사용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울증환자로 하여금 불륜의 관계를 청산하게 하고 아내에게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게 했을 때 비로소 그 환자가 마음에 깊은 평안을 느끼고 우울증으로부터 회복된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고 혹은 다른 사람들도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과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결코 사랑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남의 페이퍼를 베껴 A+를 받았을 때 진정으로 자신이 실력자임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반대로 유혹을 이기거나 남들 다 하는 편법과 불법이라 할지라도 굴하지 않고 합법적인 행동을 했을 때에는, 누가 알던 알지 못하던 상관없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는 떳떳함과 당당함으로 인해 자기를 사랑하고 존중하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을 느낄 때에는 말 할 수 없는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솟아날 것이다.

둘째는 문제해결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매일 일상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잘 이해하고 잘 해결하는 것은 자존감에 큰 도움이 된다. 만약 여러 상황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갈등들을 잘 인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한다면, 자기에 대한 실망과 좌절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필요한 실력을 쌓아야 한다. 학생으로서 혹은 직장인으로서 혹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거기에 합당한 성실과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실력이 없으면 실수와 실패하기 쉽다.

또한 문제해결능력에는 지혜가 필요한데, 지혜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중요한 과업으로 규정하고 있다.(롬12:2)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씀 안에 너무나 분명한 교훈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무엇을 옳다고 하시는지 또 무엇을 나쁘다고 말씀 하시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고 지키는 삶이 중요하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시111:10)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사랑의 삶이다.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고 풍요롭게 한다.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반대로 사람들을 미워하고 해치며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조종한다면, 우리 마음은 불만과 비난 그리고 분노로 가득할 것이다. 불만과 비난으로 가득한 나 자신을 사랑하기는 어렵다. 결과적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아질 것이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이 많고 못 마땅한 사람이 많을수록 자존감은 낮아진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비록 지난 과거에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바로 그분의 섭리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중하여 그분의 섭리대로 산다면, 결국 우리는 자신을 존중하게 되고 자존감은 높아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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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발견하는 축복을 가져다준다. 동시에 사랑하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죄성’에 당황하기도 한다. 결국 사랑은 우리에게 하나님 마음을 발견하는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깊은 내면의 성찰도 가져다주어 우리를 성숙케 하는 것이다.

민수(가명)는 고아원에 있는 아이로 오랜 기간 우리 가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마음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명절을 같이 지내기도 했는데 그 아이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은 군대 간 아들 진호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새벽녘에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 침대에서 떨어졌어!” 아이의 방에 달려가 안아주며 “저런 놀랬지, 다친 곳은 없어?”라고 묻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쳤다. ‘주님! 고아들은 이런 때 누구를 부릅니까?’ 물론 박한 재정으로 고아원에 침대를 설치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과 놀램을 당할 때 과연 누구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날 밤 마음의 아픔을 느끼면서 비로소 우리에게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고 부탁하신 주님의 심정을 조금 알 수 있었다. 후에 진호보다 1살 어린 민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민수를 만난 후 처음 맞이하게 된 어린이 날이었다. 무슨 선물을 할까 망설이다가 직접 물어 보았는데, “장난감이 가지고 싶어요!”라며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우리 네 식구는 가까운 백화점에 갔다. 마침 대목이라 장난감 코너에는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민수는 정신없이 이 물건 저 물건 만지고 있는데 점원 눈치가 보인 나는 그의 귀에다 살짝 “빨리 골라”라고 말했다. 그때 남편이 나의 손을 슬그머니 뒤로 당기며 “그냥 내버려둬. 지금 선택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거야. 언제 이런 일이 있었겠어? 모든 것이 다 자기 것 같은 기분일 텐데...” 드디어 골랐다. 그런데 3만 5천원! ‘주님, 너무 비싸요. 진호도 그렇게 비싼 것 안 사줬는데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비싼 것 안다. 하지만 나는 내 아들 민수에게 그것을 선물해 주고 싶구나!’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주님께 참 감사했다. 민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민수는 내 눈에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보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와의 만남이 항상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숨겨 버리고 싶은 나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심, 이중성과 위선, 사람에 대한 편견, 희생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리고 끊임없는 계산들이 주님 앞에 환히 드러나 수치심과 실망감에 몸서리쳐질 만큼 나 자신이 밉기도 하다.

민수가 초등학생 때 일이다. 여름방학 중 며칠을 함께 집에서 보내는데, 어린 민수는 더위에 자기 몸 관리를 잘 하지 못해 온몸에 모기가 문 자국과 긁어서 흘러내린 진물로 얼룩져 있었다. 집에서 깨끗하게 샤워를 시킨 후 큰 수건으로 몸을 닦으려 하는데 어쩐지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수건을 그의 몸에 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별도리 없이 꺼림칙한 마음으로 닦아주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려니 자꾸만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주님은 죄악으로 얼룩진 나를 위해 그 큰 희생을 감당하시며 그래도 사랑한다고 지금까지 나를 안고 보호해 주셨는데... 주님 앞에 엎드려 깊은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은혜를 모르는 교만하고 가증스러운 내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부끄럽게 하셔서라도 나를 겸손하고 성숙한 자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인내가 감사할 뿐이었다.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닌 것 같다. 주님과 나 그리고 사랑해야 할 대상, 이 삼각관계 속에 부딪히고 깎이며 채워지고 누리는 사랑의 역동이다. 이 과정 속에 우리는 사랑을 보며 또 죄를 보게 된다. 그래서 더 큰 은혜를 발견하고 누리게 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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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정도 여러 명의 개척교회 목사님 자녀들에게 영어공부를 가르친 적이 있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빠듯한 재정으로는 남들 다하는 영어 과외공부 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를 가르친 아이 중 특별히 기억나는 재미난 아이가 있었는데 바로 성환(가명)이다. 성환이는 성격이 배우 밝고 귀여운 아이였지만 공부 중에도 일어나 여기저기 움직이고 숙제도 자꾸만 잊어버리곤 했다. 여러 말로 타일러 보지만 잘 먹히지 않아 좋은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것은 성환이가 바람직한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포착하여 마음껏 칭찬하며 숙제 해 올 때마다 예쁜 스티커를 공책에 붙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스티커가 20개가 모이면 문방구에 가서 평소에 사고 싶었던 3천 원 정도의 물건을 사 주는 것이었다.

성환이는 이런 방법을 너무 좋아했고 덕분에 숙제도 열심히 했는데, 어느 날 스티커 19개 모은 공책을 잊어버렸다며 마구 우는 것이었다. 나는 성환이 말을 그대로 다 믿어주고 새로운 공책에 해 온 숙제를 점검한 후 예쁘고 큰 스티커 하나를 공책에 ‘꽝’ 붙여주었다. 바로 20번 째 스티커였다. 그리고 우리는 신나게 곧바로 문방구로 갔다. 속상한 얼굴에서 환한 밝은 모습으로 바뀐 성환이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후에 성환이는 공부도 잘하고 착한 어린이로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어느 날 엄마에게 그 이유를 “영어 선생님이 나를 잘 가르쳐 줘서 그래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그 말 그대로 나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성환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겨우 일주일에 한번 하는 영어 공부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작은 섬김을 큰 열매로 이루셨다.

 
김 집사님은 모시고 살고 있는 시어머니와 관계가 매우 좋지 못하였다. 양쪽 모두 피해의식과 억울함으로 서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가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안타깝게도 시어머니가 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이런 엄청난 통보 앞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어떻게 이 관계를 도와야 할지 몰랐지만 일단 일주일에 한번 씩 김 집사님의 시어머니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 구역 예배를 마친 후 발걸음을 김 집사님 집으로 향하였다. 누워 계신 할머니에게는 주로 과거에 있었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질문들을 하였다. 예쁘셨을 젊은 시절 이야기, 학창 시절의 추억, 잘 자라주는 손자들 이야기,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 하나님 이야기... 뼈만 남은 앙상한 얼굴이셨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화색이 돌고 행복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며느리 김 집사님에게는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매일 시어머니에게 두세 번만 말을 건네라고 하였다. 예문까지 만들어 주었다. “어머니 날씨가 참 화창한데 거실에 나오실래요?” “오늘은 밖에 비가 오네요.” “특별히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만들어 드릴께요.” “이번 주는 아이들 시험 기간이에요.”...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김 집사님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어머니께서 소천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천하시기 전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에게 전화하여 귀한 딸 데리고 와서 너무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며느리 김 집사님에게도 “고마웠다.”며 마음을 전하셨다 했다. 그동안 가졌던 서로에 대한 앙금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훈훈한 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장례식장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감사로 가득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위에 소개한 성환이나 김 집사님 경우 모두 큰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그저 일주일에 한 두 시간 정도 소요될 뿐이다. 다만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섬기며 살고 싶은 소망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런 작은 섬김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그 섬김을 기쁘게 받으시고 큰 열매로 되돌려 주신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가장 큰 ‘기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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