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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정답게 놀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지는 저녁 때가 되었다.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얘, 하루살이야. 오늘은 이만 놀고 내일 또 놀자!”고 제안을 했다. 하루살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 메뚜기야. 내일이라는 것이 뭐니?”하고 물었다. 메뚜기는 열심히 내일에 대해 하루살이에게 설명을 했다. “내일이라는 것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동녘으로부터 밝은 빛이 나오고 그 밝은 빛이 나오면 찬란한 아침이 있는 그 때가 내일이지.”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하루살이는 하루만이 그의 생명이지, 그 다음 날을 살아본 일이 없기 때문에 메꾸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너하고 다시는 안논다.”하며 가버렸다. 메뚜기는 “내일이란 틀림없이 있는데….”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 메뚜기가 이번에는 개구리와 친구가 되었다. 며칠을 신나게 놀았다. 그러자 어느날 개구리가 말했다. “메뚜기야, 이제 차차 날씨가 추워오는구나. 우리 이제 그만 놀고 내년에 만나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놀랬다. “개구리야, 내년이라는 것이 뭐니?” 메뚜기는 일년생이라 한번도 그 다음 해를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개구리는 열심히 내년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내년이라는 것은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겨울이 지나면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를 할 때, 저 산 넘어서 아지랑이가 올 때를 말한단다. 그 때를 우리는 봄이라고 하고 그것이 바로 내년이야.”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해도 메뚜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개구리가 자기를 업신여겨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여 토라져 “다시는 너하고 안 놀아” 하고 가버렸다. “내년이란 틀림없이 있는데…” 개구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모든 일을 대할 때에 어떤 관점에서 사건과 사물을 보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도자와 추종자의 차이는 관점(perspective)을 살아가는가의 차이이고, 평범한 지도자와 위대한 지도자의 차이는 좋은 관점(better perspective)을 가졌는가의 차이다”라고 하였다. 지도자들은 바른 관점, 크고 넓은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는 삶을 전체의 관점(Life-long Perspective)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현재(here and now)를 그것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삶의 일부로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이 필요하다. 그러면 삶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첫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끝을 마음 속에 두고 시작한다.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실행하게 했던 하나의 프로젝트가 있다. 하얀 종이에 묘비를 그리고 자신의 묘비에 무엇이 쓰여지기를 원하는지를 작성하도록 하게 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우리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오늘 하루 하루의 삶이 모여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을 마지막 평가를 의식하고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둘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현재를 일생에 걸친 삶의 개발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근시안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옴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오늘 경험한 실패가 처한 그 상황에서는 좌절의 이유이지만 긴 안목으로 삶을 보는 관점에서 발전의 기회요 성공의 예비 단계일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시야를 넓힐 때, 문제는 전혀 새롭게 다가옴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은 작은 성공에 교만하지않고 작은 실패에 좌절하여 넘어지기보다는 도리어 그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삼는 자세를 가진다. 나는 십 여년 전에 공부를 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에 왔었다. 그런데 소위 말해서 실패를 경험하고, 1년 뒤에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 채로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방에 꼭 쳐들어 박혀 지내고 있을 때, 아버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내 방에 들어오셔서 나에게 조용히 위로의 말씀을 해 주셨다. 그때 아버님께서 주신 “애야! 인생은 긴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다시 준비해라. 오늘의 아픔이 앞으로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두고두고 나의 삶에 큰 힘이 되었다. 결국 아버님의 말씀이 옳았음이 나의 삶을 통해 입증되어, 그때는 실패요 좌절이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사명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목적하였던 것보다도 더 귀한 일들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더욱 깊은 교제 속으로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며 충성, 순종, 인격 형성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귀중한 것, 영원히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결국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이고 그로 인하여 맺어지는 인격의 성숙이요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넷째, “삶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은 우선 순위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분명한 목적을 인식하고 자신의 은사에 맞는 역할을 고르고 그 일에 집중한다. 인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그 제한성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삶을 살기 위하여 집중하는 지혜를 갖는다.

당신은 오늘 당신에게 주어진 삶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눈앞에 펼쳐지는 일을 전부로 생각하는 근시안적인 관점인가 아니면 삶을 전체적인 관점(Life-long Perspective)에서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관점이 변하면 삶의 자세가 바뀐다.

* 예화는 이용삼 목사님의 “가나안의 명상”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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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5월호

바이올린 경연대회를 하루 앞둔 딸아이가 열심히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기특한 마음에 음료수를 들고 방에 들어가니 딸아이는 찬송가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고등부 찬양팀에 가입한 이후로 우리 집에는 늘 그 애가 연주하는 찬양이 흐르고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선율에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긴장했거나 예민했던 신경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따듯해지는 경험을 자주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날은 바로 대회 전날이라서 저는 어느 부모나 그렇듯이 잔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회 출전곡을 더 열심히 연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적을 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딸아이는 주일날 연주할 찬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저는 그날 딸아이와 모처럼 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와 편협한 사고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때 많은 크리스쳔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을 합니다. 자신이 이룩한 성과라고 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에 대한 감사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좋은 것, 귀한 것을 구했을 때, 남들 보다 앞서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소중함과 기쁨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귀한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선뜻 동감할 수 없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한 느낌에 빠지곤 합니다. 과연 우리가 빛나는 자리에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다지 뛰어난 점도 없어서 남의 주목을 받기는커녕 어느 자리에서나, 있는지 없는지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모든 것이 평균적인 기준에 못 미쳐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소외 당하는 사람들, 병들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가난과 무지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이 없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어둠의 존재들인 걸까요? 하나님의 전존재가 영광 그 자체임이 확실하다면, 아름답고 뛰어난 존재만이 그 영광의 한 부분을 반사하고 있는 걸까요?

주변의 모든 부모님들이나 제 자신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 오거나 무언가 재능을 발휘해서 상을 받거나 남들에게 칭찬 받을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낍니다. 자랑스러움과 기대감으로 벅차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 경우 가장 행복하고 오래가는 기쁨은 아이들의 사랑을 확신하고 교감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비록 아이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말썽을 부릴지라도, 남들에게 칭찬 받지 못할지라도 자식을 미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아프거나 장애가 있어서 생활을 힘들게 할지라도 다만 같은 공기를 마시며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그 존재가 귀한 것이 모든 부모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식 앞에서 모든 부모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는 강함과 한없이 양보하고 용서하는 약함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 모든 힘은 '나의 피와 살을 나눈 나의 존재의 일부!'에 대한 끝없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할 때,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할 때 더욱 깊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하나 자랑할 것도 칭찬받을 것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 얼굴을 바라볼 때 내게 반사되는 빛이야말로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습, 내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의 오묘함과 살아가는 일들의 질서와 모든 관계와 모든 느낌들의 총체적인 주권이 내게도 있다는 것, 하나님의 형상과 속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느낄 때,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찬양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사랑에 대한 감사와 살아있음에 대한 기쁨, 그 영광을 나누는 감격의 표현인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상황과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값진 선물이기에 어느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려하지 않고, 매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주어진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고 충만하려는 것이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음의 모든 행위와 느낌들이 우리의 찬양이고,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딸아이와 이야기하면서 찬송가를 연주하는 것 만이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곡을 연주하던, 그 연주 실력의 깊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연주는 모두 찬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나무에 활짝 핀 꽃들 만이 아니라 발에 밟히는 잡초들도 바람이 불면 소리를 내며 자기 몫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그 성과의 크고 작음을 견주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의 사랑을 주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는 목소리에 영광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공평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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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4월호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블루밍턴에 있는 인디애나 주립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과정을 밟고 2002년 5월에 가족이 있는 북버지니아로 왔습니다. 그해 7월부터 시작되는 직장생활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하게 될 나를 보면서 긴장감도 없잖아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제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은 조만간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출퇴근이 너무 오래 걸렸고, 일 하는 나의 노력에 비해서 월급은 너무 조금 나왔고, 특히 나의 동료들의 95%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저에게는 가장 큰 부담으로, 불평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부담은 이어 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상시 2세 교포 친구들과 주고 받는 농담을 던졌더라면 크게 상처받을 제 동료를 생각하면서, 저는 말 하기를 꺼려 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내 뱉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부담감은 3개월이 지난 후에는 나의 일상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그 부담감에 잘 적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부담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년 9월에 저희 회사에서 주최하는 4000 명이 넘게 오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애나하임에서 열려서 기대에 찬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어떤 남자 직장 동료가 저에게 다가 와서는 제가 그의 직장동료가 아니었다면 저와 사귀자고 물어봤을 것이라며, 제가 어떤 방에서 묵고있는지, 그날 밤에 뭘 하는지 저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그날 저녁에 제 방으로 놀거리를 보내겠노라 하며 노골적으로 말을 했습니다. 저는 눈치가 그리 빠르지는 않지만, 제 동료는 절대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해 본 적이 없는 저는 무서웠고, 두려웠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필요했던건 나의 심정을 들어 줄 수있는 친구였고, 감사하게도 애나하임 부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그 날 저녁에 만났습니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을 나누고 기도 부탁을 하고, 또 위로를 얻을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런 일이 매달 일어나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나를 위축시키고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물어 온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왜 나를 여기로 보내셨습니까’ 입니다. 회의적인 질문도, 반항적인 질문도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해서 내뱉는 나의 솔직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아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저를 왜 이 직장으로 보내셨는지 이유가 명백해 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게 주시는 마음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저로 하여금 내 이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산 지가 벌써 13년째 되어 갑니다. 저는 한 인종을 또는 한 그룹을 더 선호하거나 혐오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한다면, 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건, 제가 게이나 레스비언에 대한 편견이 – 심한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으로 손수 빚어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든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모든 영혼을 사랑해 줄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리라 확신합니다. 나의 편견을 넘어, 하나님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동성연애가 막중한 죄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피조물을 미워하고 편견의 안목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삶을 통해 명백히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2년간 격어온 갈등, 부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체험한 분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시고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한 마디의 대꾸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 18). 순종하는 모습을, 죽임에까지도 순종하는 모습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께 조심스레 질문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를 사랑하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죽임을 당하면서 까지도 새계명을 순종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듯 싶어서 이 모든 것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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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4월호

06년 6월 6일 밤에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났다. 전 세계는 핵폭탄에 의해 가루가 되었고 핵미사일이 태양의 중심을 타격했다. 지구는 완전한 어둠과 추위 속에 빠져버렸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까미유가 잠든 사이에 일어났다. 그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세상은 암흑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가 어둠 속을 헤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오직 그의 손에 있는 검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괴물들이 지구를 점령했기 때문에 까미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검을 내리치며 거리를 다닐 수밖에 없다. 자신을 공격하려는 괴물들을 먼저 공격하는 법을 익혀가면서 그는 자신을 지켜갔다. 어느 날 아침 몇 명의 강도들이 그를 공격해서 난투를 벌였지만, 결국 그는 납치당하여 낯선 곳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에테르 냄새를 풍기는 한 사람이 그에게 말한다.

삼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고 태양도 지지 않았으며 다만 까미유가 시력을 잃었을 뿐임을.

그가 싸웠던 괴물들은 그가 차에 치거나 건물에 부딪치지 않도록 도우려는 손길들이었으며

그의 검은 양로원에서 준 지팡이였음을 설명해준다.


위의 내용은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암흑'이라는 짧은 소설을 요약한 것입니다. 짧은 내용 속에 함축된 의미에 동감을 하게 됩니다. 주인공 까미유는 아마도 늘 핵전쟁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늘 그의 생각을 차지하고 있어서 언젠가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갖게 했고, 그가 시력을 잃은 밤, 꿈속에서 전쟁을 경험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환상을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은 그에게 세상은 암흑이 되어 버렸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 근심을 쉬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그에게서 보입니다. 때로 그 걱정, 근심은 구체적이지도 않고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우리를 덮치고 스스로 만든 그물 속에 갇히게 만듭니다.

자신의 내면의 빛을 지워버린 것을 세상에 빛이 사라졌다고 공포에 떠는 모습.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만나는 괴물의 실체는 자신이 만들어 낸 공포와 죄의 형상일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내면의 등불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지, 오해와 편견 때문에 사랑의 손길을 뿌리치며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봅니다. 세상의 어둠의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가 휘두르는 검은 자신을 지키기 보다는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되어버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더 강한 검을 구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명예의 검, 권력의 검, 물질의 검을 구하여 휘두를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빛은 점점 더 흐려져만 가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빛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려 우리는 빛의 존재 자체를 망각하곤 합니다. 내 안에 환한 불이 켜 있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을 분명하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불의와 정의로움, 선함과 그릇됨, 진실과 미혹의 분별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식견도 눈과 마음이 밝고 맑을 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따스하고 밝은 불빛은 다른 사람들과 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근심보다는 희망을, 불안보다는 평강을, 다툼보다는 이해와 화해를, 인내와 온유의 밝은 빛이 넓게 퍼져나가 다른 이들의 가슴에도 환한 등불 하나를 켜주는 시대를 꿈꾸어 봅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정결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밝은 햇살 앞에 그대로 드러나듯이, 우리 안의 부정한 것들도 빛의 씻김을 받으면 더욱 아름다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투명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듯이, 자신의 안에 빛을 가진 자는 타인의 내부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처음 지음 받은 모습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지으신 분의 성품을 알아갈 수록 그 빛은 선명하고 강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빛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 그 길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고난의 훈련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처음 빛을 바라볼 때 느끼는 통증과 혼란의 과정을 통해서 눈은 서서히 빛에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며, 이제는 감출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단단히 자신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에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검이 아니라, 어둠을 물리치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나와 세상의 어둠을, 불의함을, 거짓됨을 잘라내는 검을 꼭 잡고 이 거칠고 오염된 세상을 걸을 때, 우리에게 더 이상 적은 없고 오직 사랑해야 할 이웃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 내민 손길이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세상에서 빛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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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코스타와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7년이 되었습니다. 12년의 유학생활동안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코스타가 제겐 얼마나 감사함으로 늘 고백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으로 코스타를 쫒아다니는 제 모습을 보며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 대답은 코스타 현장에 직접가면 알수 있다는 대답밖에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스타를 통해 확실한건 새로운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계속 찾아가고 있고 지금까지도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코스타를 통해 변해가고 있는 저의 작은 삶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아회복

첫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는 제 자신의 자아와 자존감을 회복 했습니다. 십이년전 중학교때 ‘조기 유학’의 섭인관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려고 제 자신과 싸우며 제 자신을 지키는 훈련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에 입학할때쯤 제 자신이 어디에 속한지 몰라 고민이 되어 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민 사회와 교회에 섞여 제 자신의 정체와 유학의 목표를 잊고 살가갈때쯤 하나님께서 1998년 코스타로 불러주셨습니다. 코스타에서 새롭게 만난 하나님께 다시한번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며 내 자신조차도 몰랐던 유학생활의 아픔과 상처들이 발견되고 그 고통을 치유해주시며 새로운 자아상과 내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유학이 특권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특권이 사명감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제가 할 공부와 신앙을 어떻게 연결 시켜야 하는지 가치관을 확실하게 정할수 있었습니다.

비전

두번째로 코스타를 통해 저의 시야가 넓어져 세계를 바라보고 제 가슴에 품을수 있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선교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처음엔 선교는 저 같은 사람은 할수 없다며 늘 고개만 절레 흔들며 멀게도 어렵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에 대한 관심과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고 지역을 생각하게 되었고 나라와 세계를 바라 볼줄 아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 삶에 선교의 비전과 소망들이 자리잡아 가게 되었습니다. 3년을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때에 저의 삶을 다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국가가 멸망하고 포로된 자들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하시겠다는 언약을 잊지 않으심을 기억합니다.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나라를 보며 그 나라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하며 나의 역활은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코스타가 아니였더라면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제 자신밖에 바라보지 못할뻔 한 삶인데, 코스타 덕분에 많은 세계구경을 하고 간접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의 삶

마지막으로 코스타에서 조장으로써 섬김을 통해 제자의 삶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코스타의 또 다른 매력 JJkosta 수양회로 영혼을 사랑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섬길수 있도록 성령님의 힘을 얻는 방법을 깨닫고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속한 6지역의 코디님과 환경을 극복하며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시작했던 원투원으로 말씀과 씨름하며 말씀에 인도되어지는 삶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작년부터 원투원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어도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할지 몰랐고, 때로는 부끄러워서 생각처럼 행하지 못할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능력으로는 부족하지만, 시간이 흘르수록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마음들이 기쁨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곳은 영적으로 훈련받고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엔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광야에서의 외로움도 제게는 홀로있는 훈련이자 하나님을 가장 많이 만날수 있었음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이시고 함께하시는 시간들이 외로움이 아닌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과장소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우리 코스탄들의 믿음이 연단되어 지는 값진 시간들임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많은 시험을 받았듯이, 많은 유혹과 영적 위기에 빠지기 쉽지만 동시에 영적인 축복의 기회임을 확신합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사32:15)

아픔도 많고 시련과 좌절도 많은 광야같은 우리 삶의 현장들이 아름다운 동산이 되길 소망합니다. 광야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코스타를 통해 광야가 고난의 모습을 가장한 축복의 장소임을 저에 부족하고 모자란 삶가운데 깨닫게 해준 최대의 선물이자 은혜임을 마지막으로 고백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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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3월호

연극에서 배우가 자신이 맡은 인물에 대해서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대부분 상상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그가 성장한 배경, 현재의 환경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심지어 그 인물의 외모, 성격, 가족, 친구 관계, 신앙, 특이한 버릇... 모든 것을 세밀하게 생각하고 그 연극에서 요구되는 인물과 가장 적합한 한 인물의 인격을 창조해내는 것이 배우의 몫입니다.


현실에서 연극의 한 부분을 이용하다 보면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연극을 통해서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거나 경미한 정신, 심리 질환에도 치료효과가 상당히 있는 것을 봅니다. 연극 속의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자신과 동일화하려고 노력하듯이, 일상 속에서도 타인에 대해 내가 그의 역할이 되어보는 것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그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룹 성경 공부를 할 때 저는 가끔 연극적인 방법을 이용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극화해서 각 사람에게 역을 맡기거나, 대화하는 장면을 대사 읽듯이 감정을 살려 읽어보라고 권하곤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시키는데, 가장 솔직하고 미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명이나 간증, 지식적인 주석 보다 가끔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고 참 감사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청소년들과 이성간의 교제와 결혼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창세기를 읽게 된 경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18-25절까지를 즉흥적으로 연기해보라고 했을 때 학생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풍족한 자연을 즐기는 아담이 종일 아름다운 벌판을 거닐며 시간을 보낸다. 아담이 지나치는 곳마다 새로운 식물과 동물을 만난다.



아담 : 내가 너를 장미라고 부르겠다. 너는 장미가 되어 향기와 예쁜 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라. 내가 너를 사슴이라 부르겠다. 너를 호랑이라 부르겠다. .....

이것을 말하고 난 학생은 자신감에 넘쳤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말 커다란 권위를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종일 먹고 즐기고 다니던 아담이 어두워지자 주변을 둘러본다)



아담 : 하나님, 다 좋은데요, 무지 심심하거든요. 누가 같이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혼자 많은 일들을 하려니 힘들어요. 생각도 잘 안 떠올라서 누가 도와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의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이브를 만드시고, 아침에 일어난 아담은 아름다운 이브를 발견한다)

아담 : 앗 !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요 !

내게 와주어서 너무나 고맙소 (몹시 기쁘고 감격하여 펄쩍 뛰면서 춤을 춘다)



이브 : 나는 당신을 돕고 함께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두 몸이지만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번성하라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아담 :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하고 서로 부끄러운 일이 없어야 해요.


그 날의 공부는 스스로 깨닫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존재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기쁘고 감사한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과, 서로 돕고 의지하는 관계를 맺고 서로 존중해야한다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명, 남녀의 역할에 대해 어렴풋이 정리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학습과 토론을 통해 분명한 가치관을 정립하기까지 확실한 기초 작업을 한 셈이지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짧은 삶도 어쩌면 하나님이 기획하신 커다란 연극 무대에서 한 배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결코 우연함이 없는 완벽한 대본과 연출에 따라 자신이 맡은 인물을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는 것 말입니다. 언제 등장해서 무대 어느 쪽에 서야하고 언제 퇴장해야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연출가의 몫일 뿐입니다.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어 각광을 받거나 조연이나 단역을 맡거나, 영웅이 되거나 악당이 되거나 상관없이 그 연극이 완성되고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역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인물도 추한 인물도, 완벽한 성품과 지혜를 가진 인물도 어리석은 인물도, 부자도 걸인도 우리의 커다란 드라마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훌륭한 배우는 더 근사하고 멋진 역할을 하게 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 이 기피하는 역할을 완벽하게 표현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주셨건 하나님의 무대에 초대받았다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이 아닐까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통해서 연출가의 의도와 목표가 잘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배우야말로 트로피를 손에 쥐고 웃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겠지요. 연출가의 마음과 배우의 마음이 일치할 때의 기쁨은 서로가 늘 가까이 있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어떤 역을 맡았는가 보다는 얼마나 아름답고 진지하게 나의 역을 감당했는지를 연출가는 눈여겨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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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2월호

코스타의 모체가 되는 제 20회 Urbana집회가 지난 2003년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이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미국 전역과 93개국(미국에 있는 각나라 유학생들)에서 온 20.000명의 크리스챤들이 모인 이번 집회에서 제가 느끼고 경험했던 하나님의 기적들을 이곳 eKOSTA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1946년 부터 3년에 한번씩 열렸던 Urbana집회는 우리나라에선 IVF(대학생 선교회)로 많이 알려져있는 InterVersity Christian Fellowship에서 후원하는 Student Mission Convention입니다. 현재 미국의 거의 모든 Community College 부터 사립,주립대학까지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이 크리스챤 단체는 “대학생 복음화”라는 큰 미션을 가지고 자본주의와 유물론으로 병들어 가고 있는 대학교 캠퍼스 복음화 사역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IVCF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각 지역에도 퍼져 있어 Urbana 집회를 마친 선교에 열정있는 대학생들의 단기 선교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선교대회인 만큼 대학생들에게 선교의 비젼을 강하게 심어주는 집회입니다.

코스타와 마찬가지로 Urbana03도 4박5일의 일정중에 3일째 되는 날 점심 금식을 하면서 세계를 품에 안고 기도했습니다. UIUC Assembly Hall에 모인 20,000명의 학생들과 선교사들, 사역자들은 대형 스크린에 표시된 세계 지도안에 구체적인 나라들(크리스챤들이 가장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는 나라들, 기아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 내란으로 평화가 없는 나라들…)을 놓고 그 나라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가며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 시간에 기도 뿐만이 아닌 실제적인 우리의 헌신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선교 헌금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1.1million이라는 엄청난 헌금이 모인것입니다. 여기에서 스토리는 끝난것이 아닙니다. 다음날 저녁, InterVersity에서 엄선하고 또 엄선한 세계 각 지역에 가장 효율적으로 Impact를 줄 수 있는 선교단체의 Director들이 집회 무대 위에 모였습니다. 어림잡아 20여개 단체 정도 되었던것 같습니다. Urbana03 Director 였던 Jim Tebbe는 그 자리에서 1.1million의 선교자금을 20,00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각 선교단체 장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중에 자랑스럽게도 Mission Korea가 껴있었습니다. 다시한번 우리나라에 그 분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드렸습니다.

수련회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비결, 또 받은 은헤를 생활과 학교에서 유지해 나가는 비결

코스타2003 찬양팀과 함께 “Roman 16:19 says” 를 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님안에서 한없이 기뻐하던 때가 어그제 같은데 벌써 몇개월 후면 코스타2004가 등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다시한번 시간은 화살같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코스타 2004를 6개월 앞두고 작년 코스타에서 만났던 조원들, 조장들과 이메일이나 전화로 나누는 얘기들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다음 코스타에선 어떻게 하면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작년 코스타때 받은 은혜들을 지금 나의 삶에 적용하며 유지 할 수 있을까?” 위의 두 질문들은 아마도 모든 코스탄들이 받는 도전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아니 큰 집회 혹은 지교회 수련회를 준비하거나 그 후에 은혜를 받았던 모든 크리스챤들의 공통적인 도전과제 임에 틀림없습니다.

6년간의 미국 유학생활동안 많은 큰 집회들을 다니며 겪었던 제 경험으로 부족하지만 집회 준비와 그 후에 받았던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제가 시도했던 여러가지 방법들과 그 비결들을 이곳에서 여러 코스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999년 SDSU에서 열렸던 JAMA99’(Jesus Awakening Movement of America)를 시작으로 코스타2002, 코스타2003, 일본코스타 2003, 바로 2주전에 막을 내린 Urbana03까지 제가 참석 했던 이 큰 집회들 프로그램에 흐르고 있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많은 공통점들이 있겠지만 3가지로 압축해본다면, 첫째, 영접의 시간(재헌신의 시간), 둘째, 선교에 대한 비젼을 심어주는 시간(선교헌신의 시간), 셋째, 세미나를 통한 전공(혹은 흥미분야)과 선교와의 접목의 시간 입니다. 이 세가지의 큰 흐름을 우리 영혼 깊은곳으로 흐르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몇가지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큰 집회나 수련회때 은혜를 더욱 더 많이 받기 위해 준비해야 할 3가지에 대해 나눠 보고자 합니다.

집회나 수련회 준비기간에 해야할 일 3가지

첫째는 새벽기도 제단을 쌓는 일 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집회나 수련회를 통해 변화 받아야 하는 자기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놓고 기도 합니다. 새벽기도의 힘은 물론 그 시간에 받는 말씀의 도전도 중요하지만, 매일 아침 새벽에 단잠을 깨운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자기 부인” 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횟수나 기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번을 가더라도 그 새벽에 자기의 모든 죄악된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는게 중요하죠. 주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더 없는 큰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저는 항상 새벽에 잠을 깨우는 저만의 비결 한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챤 라디오 스테이션에 알람을 맞추어 놓죠. 잠결에 들리는 워십송은 하루종일 저의 머리에서 맴돌곤 합니다. 캠퍼스에서 그 잠결에 들었던 워십송을 흥얼거리기도 하죠. 말 그대로 Walking Q.T. 인 셈이죠. 또 하나 제가 잘 사용하는 방법은 새벽에 일어나기 정말 싫을 때 제가 외우는 자기 주문이 있습니다. “30분후에 일어나도 똑같은 기분일꺼야.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자 ” 기억하세요. 새벽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우리 코스탄도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집회나 수련회때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을 통해 선포될 말씀들을 먼저 읽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2003 코스타 조장과 Urbana03 small group leader 로 섬기면서 “집회때 선포될 말씀을 먼저 읽어 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준비된 영혼을 기뻐하십니다. 집회때 말씀을 먼저 읽고 그 집회에 참석한다면 우선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집회때 더욱 풍성한 은혜와 말씀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됩니다. 사실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바로 한번 읽어서는 깊은 이해와 그 속에 숨겨진 본뜻을 이해하기 어려움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특히 전도서나 로마서와 같은 파워풀한 서신들은 같은 구절을 두세번 읽어야만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집회에 오셔서 그 말씀들을 예습하겠다는 생각은 미리 포기하세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코스타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합니까? 안그래요?

셋째는 세미나를 고르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에 Urbana03에 가서 절실히 깨닫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미나가 큰 집회들의 Core란 사실입니다. 코스탄 들은 흔히 아침, 저녁의 다같이 모이는 session에 비중을 두곤 하죠. 하지만, 집회가 끝난 이후에 받은 은혜를 일상 생활과 자기 학교 생활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세미나란 사실, 잊지 마세요. 또한 세미나의 제목만 보고 그 세미나를 선택하는것은 좋은 선택방법이 아니라는 사실도 같이 알려드립니다. 강사님들의 스타일을 보세요.(모르시면 주변에 작년에 코스타를 갔다 오셨던 분들이나 JJKOSTA에 문의 하셔두 됩니다.) 물론 모든 세미나 강사님은 미국과 한국에서 검증되고 엄선된 분들이시지만,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들과 Talent를 가지고 계시니깐 세미나 후에 이메일 받아 놓으시는 것두 잊지 마시길!

지금까지는 집회와 수련회때 은혜를 듬뿍 듬뿍 받기 위해 준비해야할 사항들을 같이 나눠봤구요. 이제부터는 집회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에 대해 같이 나눠보고자 합니다.

큰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 받은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

코스탄들 사이에서 오가는 속설이 있습니다. “코스타 약발은 오래 가면 6개월 간다더라 ”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영원을 얘기하고, 천국을 얘기하는 우리들이 6개월이라니요? 여기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 3가지가 있습니다.이 방법들은 제가 길게는 6개월 짧게는 3개월이상 시도해본 방법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시도해 보시길.

첫째, 세미나 테입을 정기적으로 듣는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지금 이글을 보시는 분들중(많이 찔리실 테지만), 코스타에서는 정말 앞을 다투어서 세미나와 집회 테입을 사셨던 분들, 오늘 밤, 아니 이번주 안에 책장과 서랍에 먼지 부옇게 쌓여 있는 테입을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코스타의 감동이 새록 새록 다가옵니다.

둘째는 코스탄들과 삶을 나누는 것을 적극 추천합니다. KOSTA USA는 끝남과 동시에 1달이상의 여름방학 기간이 있잖아요. 제가 작년에 갔던 일본 코스타는 8월 중순에 시작하기때문에, 끝나자 마자 학교 일에 너무 바뿝니다. 보통 조는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나 같은 주에 있는 사람들로 많이 구성됩니다. (늦게 등록하신 분을 제외하고). 저는 저희 1지역 코디님과 저번 학기에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물론 학교 생활이 눈코뜰새 없이 바뿌긴 했지만, 주말을 이용해서 3시간이나 떨어진 그 코디님 집에 가서 같이 잠도 자고, 밥도 같이 먹고 코스타때 감동도 나누며 서로 은혜를 받았던 너무나도 축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코스타의 감동, 코스탄끼리 나눌때 더욱 더 풍성해 진다는 사실, 제가 깨달았던 중요한 진리중 하나였습니다.

셋째는 자기 삶에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회나 수련회 이후에도 이전의 삶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 그건 분명 그 집회나 수련회는 자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2003년 일본 코스타때 이찬수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코스타가 끝나고 은혜 받았다는 얘기는 절대로 하지말라. 그 은혜 받음은 주변사람들과 가족들이 평가해줄 것이다.” 저는 이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은혜를 받고 안받고는 자기가 평가하는 것보다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는 자기 자신에 너무나도 많이 익숙해져있기때문에 말로는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 생활은 집회 이전이나 이후 별반 달라진것이 없음을 느끼곤 합니다. 저두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었구요. Blessing=Life Changing 이라는 사실,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일에 저는 저희 교회 목사님으로 부터 조금은 특별한 설교을 들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너무나도 귀가 닳도록 듯는 기도, 기도, 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 기도가 단지 기도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활에 비교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 활을 의미하고, 화살은 그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약속, 활을 당기는 힘은 믿음이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기도는 코스타의 은혜를 유지하는 가장 큰 비결이 됩니다. 금년 코스타에선 더욱 더 많은 유학생들이 주님께 재헌신하며 세계를 향한 큰 비젼을 품길 기도합니다.

작년 코스타가 끝난 직후 한 형제가 쓴 글이 생각이 납니다. 제목은 “고민… 기도…”였습니다.

영적 Power가 현실의 삶 가운데 잘 드러날때 비로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 또다른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들이 나의 주어진 현실의삶 속으로 얼마나 영향력 있게 적용이 될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입니다. 일주일의 꿈과도 같았던 시간을 뒤로한 채 현실로 돌아와보니, 역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적어도 나는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도해 봅니다. 바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부흥이 필요한 곳이라고, 그리고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도 얻을 수 없다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시고 세우시는 목적은 나로 수고하기를 원하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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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2월호

해마다 새해가 되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한 해의 소망이나 계획을 나름대로 열심히 세우고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리라 다짐을 하곤 합니다. 해마다 비슷한 결심을 하였건만 얼마나 성실히 계획을 실천했는지 반성하는 일도 언제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가족들, 친구들과 서로의 계획을 나누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마음 아픈 일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제게 엄격한 스승이면서 따뜻한 친구로서의 역할을 함께 해주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시인으로서는 대 선배이시고, 신앙적으로는 멘토의 역을 기꺼이 감당해 주시던 그 선생님으로부터 작년 설날에 긴 편지를 받았었습니다. 여러 가지 개인적인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후배에게 거는 기대와 지침, 한국 문학에 대한 본인의 소명, 개인의 비전과 세계관등... 그동안 늘 나누었던 가치관을 느낄 수 있는 참으로 가치 있는 글이었고 선생님의 자상한 인품을 느낄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는 그 긴 글 속에서 제가 지킬 수 있는 몇 가지를 흔쾌히 약속하였습니다! 성실한 습작생활과 독서 생활, 신앙의 훈련 글을 쓰는 자세와 소명 등... 선생님도 여러 가지 약속을 제게 하셨습니다. 가령 맛있고 멋진 식당을 발견했으니 귀국하면 점심이라도 나누자는 등의 사소하고 재미있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런 글을 보내신 이후 두어 달 만에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평소에 워낙 건강하시던 분이라 본인이나 주변 누구도 병이 그리 깊은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었지요. 한동안 저는 우울하고 믿어지지 않는 마음에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지냈습니다. 다음에 귀국하면 다시 뵙고 인사를 나눌 것도 같고 편지를 드리면 답장을 주실 것도 같은 착각을 아직도 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해를 맞아 여러 분들께 카드를 보내면서 선생님께도 카드를 써보았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고 확신에 차있던 모든 계획들과 소망과 약속들을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지나간 한 해에 대해서, 부치지도 못하는 긴 편지를 써 보았습니다.

지난 늦여름 어떤 자매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던 그녀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습니다. 항암 치료로 이미 머리칼을 다 잃었고 창백한 피부는 심한 부종으로 혈관이 다 비칠 정도로 얇아져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성실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이기에 그 모습은 더욱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든 상태에 있던 그녀가 힘겨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산책을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하였기에 무리가 되는 줄 알면서도 부축을 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산책이라고 해야 기껏 집 주변을 간신히 서성거리는 정도였지만 그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긴 여행길처럼 느껴졌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온 힘을 실어야하는 힘든 상태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번져나가던 미소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집 앞의 뜰을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경이에 가득 차 오르던 눈빛과 탄성도...

옆 집 뜰에 핀 봉숭아꽃을 보다가 내년 봄 자신의 뜰에도 심고 싶다며 씨를 받던 손길과 자두 만한 배 열매를 바라보며 과연 저 배를 먹을 수 있을까하고 묻던 일들이 영상처럼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다음 여름에 봉숭아 꽃 물을 제 손톱에 들여 주겠다는 약속과 다음 주에 만나면 조금 더 멀리 산책을 나가보자는 약속조차 우리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주변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며, 사진을 찍듯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라보던 눈길과 아직 다하지 못한 일들,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말하던 떨리던 목소리가 뚜렷하게 기억나는데도 그 사소한 약속을 지킬 만큼의 시간은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몇 해전 강도를 만나 짧은 순간 동안에 죽음과 삶의 경계를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우연한 길에서 우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 단 몇 초안에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경험은 제게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하였습니다. 제가 세운 인생의 계획이나 목표라는 것이 물위에 쓴 글자나 바람에 세운 집처럼 허망한 것임을 느꼈을 때 무척 참담하고 외로웠습니다. 그 이후 저는 항상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순간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 바람에 실려온 꽃향기처럼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구속과 한계를 벗어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개념이며 연! 속되는 순간, 연속되는 현재가 영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순간을 살고 있기에 영원을 살수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으로 범위를 넓혀도 봅니다.

게으름이나 고의적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만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을 기억하면 사람의 신념이나 맹세는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한번의 오류도 없이 신실하게 지켜지는 약속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긴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구원의 약속은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 지켜지고 있고, 내일에도 영원토록 지켜질 가장 확실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무슨 일들을 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그만 하루를 보내버릴 것 같습니다. 아직 갚지 못한 청구서와 누군가에게 진 빚을 기억하려 할 것이고,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 곳을 찾으며 정다운 얼굴들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애쓰겠지요. 지난 일기들을 정리하며 용서해야 할 일들과 용서 받아야할 일들을 떠올리고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라는 상상은 마음을 한없이 초조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없이 너그럽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모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과 이웃들을 향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값지고 향기로운 말들이 넘쳐나는지, 지켜야할 귀한 것들과 무한한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아직도 무거운 삶의 짐들을 벗어버리고 가볍고 자유롭게 한 순간 순간을 호흡하고 싶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확실하게 지켜질 약속을 기다리며 생의 슬픔을 지우고 싶습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보다 가치 있고 진지한 의미를 갖게 되고, 신실하고 사랑이 넘치는 인격을 갖게 되며 진정한 소망의 빛을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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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월호

즐거운 일과 행복한 쉼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2년 지난 그동안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중 중요한 깨달음은 휴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매우 긴장하여 숨차게 앞만 보고 달려갔지만 장기적으로 도달해야할 목표지는 재충전없이 단번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일과 쉼의 조화가 적당히 이루어져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음을 더 깊이 느낀 시간들이었다. 먼 이국까지 올 수 있었고 공부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즐겁게 공부하는 한편 안식은 안식으로서 잘 쉬는 것이 하나님의 설계가 아니가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일년 반의 유학기간 동안 생활 방식을 적극적으로 바꾼 부분이 있다면 바로 취미생활일 것이다. 유학생활에 공부하기도 바쁜데 웬 취미까지야 하며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전까지의 시간에서는 아직 진로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지 못하였고 소비적인 문화가 체질적으로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에 소시민적인 취미 생활을 하찮게 보아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흐릿한 정신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도 의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이곳 생활에 적응하면서 안식의 활동이 원래의 삶을 더 충실하게 만들어줄 수있는 좋은 취미가 발견되었다. 하나는 직접 체험하기 어려운 실생활의 대화를 많이 보여주는 영화를 보는 것, 둘은 달리기, 셋은 인터넷으로 수필을 읽는 것이다. 영화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여러가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달리기는 나의 몸을 이해시켜주었으며 감동을 주는 글들은 나의 정신세계를 살찌워주었다.

영화로 세상보기

처음 영화를 보기로 시작한 이유는 영어 공부를 위해서였다. 누가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면 간단한 생활표현을 익히는데 좋을 것이라고 하는 말에 얇은 귀가 혹해서 한두개 사서 보는데 정신연령이 낮아서 그런지 혼자 낄낄대며 보곤 했다. 그런데 기왕이면 영화를 보면서 뭔가 더 생각할 수 있는 주제에 자연스레 손이가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모습으로서 가족사를 그린 작품, 인종갈등 문제을 제기한 작품, 도시민의 소외를 그린 작품, 미국의 잘 보이지 않는 문제를 다루는 것들이 더 의미있었다. 감명깊게 본 영화로는 Malcom X, Ali, Ali documentary, Do the Right Thing, Jungle Fever, Glory, Color Purple 등이다. 내가 미국의 흑백갈등문제에 관련된 작품에 손대게 된 이유는 몇 가지 체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게 소외되고 있는 흑인들에 대해 주류사회의 문제의식은 미국 사회의 다른 문제와 흡사하게 공동체적으로 정책적으로 이 문제를 이렇게 풀자 하는 논의는 거의 없는 것같다. 사회의 유기적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문화적, 정서적, 경제적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에 참여하지 못함으로 발생하는 사회 부적응 현상은 개선되어야 할 사회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교육 시스템의 약화가 흑인문제의 핵심이 아닐까 직관적으로 생각해본다. 뭐 이건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긴 하다. 한편 기독교적 시각으로 인생을 잔잔하게 그린 A river runs through it, 장애인의 시각에서 부녀간의 사랑을 그린 I am Sam, 형제애를 보여주는 The eighth, The rain man,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할 것을 말하는 Forrest Gump 등은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대사로 주제를 잘 전달하고 있다. 단정한 노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은(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쉽게 잊혀지지 않는 울림으로 강하게 자리잡는다. 지식이 지나친 세상에서 단순하고 어린아이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정신장애인(Sam)은 성경이 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의 말대로 사랑이란 일관성이며 듣는 것이며 그냥 있어주는 것이다. (Love is constancy, listening and just being there beside them). 사람들은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거라고 말하지만 Forrest Gump의 변함없는 사랑은 이 세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를 넘어선 감동은 삶의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몸이 가르쳐주는 지혜

두번째는 달리기. 문약한 서생이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머리도 둔해지는데 체력까지 무너지면 안된다는 위기의식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겨울 방학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한 달리기의 목표는 3.5마일 30분 주파. 처음에는 5분 시속 7마일로 달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하루에 2분 30초씩 추가하니 대략 일주일 정도부터는 상당한 거리를 달리게 된다. 인터벌에 다리 근육 강화 운동을 하여 몸 전체를 일사분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신기한 것은 처음에는 10분 달리기가 거의 죽을 맛인데, 하루 지나고 나서 다시 그 거리를 뛰어보면 그리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머리 속으로 더 높은 목표를 설정했고 몸이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 속으로 그 옛날 군화 신고 뛰어다니며 부르던 군가를 부르며, 2분 남으면 애국가를 일절부터 사절까지 외치며 오늘도 해냈다는 자신감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는다. 달리기를 하다보면 몸에 붙어 있는 살들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불필요한 것들은 당장이라도 떼내고 싶다. 목표치가 가까와오면 숨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단순하고 순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싶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 버려야 한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나의 욕심이다. 또 몸은 가르쳐준다. 나는 살아있고 자라고 있다고. 사춘기 시절 급박한 몸의 변화를 보며 나 자신도 신기해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 내 안에 있는 생명의 활력을 다시금 느껴본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오늘도 내게 생명력을 불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함부로 대하지 말고 관리해야 함을 깨닫는다. 지속적으로 달리다보면 체중은 비슷한데 몸이 하나로 뭉쳐짐을 느낄 수 있다. 팔도 다리도 앞으로 나가는데 적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호흡과 맥박도 고르게 맞추어진다. 교회가 하나가 될 때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움직임보다 전신의 나아감에 힘을 더하고 서로에게 힘을 더해주는 상승의 관계를 갖게 된다. 하나가 된 공동체는 공동의 선을 향해서 서로를 사랑하고 격려하며 힘이 되어주는 떼낼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인터넷에서 보석 캐내기

세번째는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남겨진 글들을 읽어보는 것이다. 이코스타를 비롯하여 수필닷컴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환경에서 얻는 간접체험은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언젠가 ‘자식에게 주는 아버지의 글’에서 ‘좋은 글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나누어라’라는 충고가 있었는데 좋은 글을 찾아 나의 생각을 덧붙여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 가치가 더욱 커질 것같다. 내가 발견한 좋은 글과 내의 단편적인 상념의 글과 내가 읽고 싶은 책과 내가 읽고 싶은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이상과 희망을 되새길 수 있는 나와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런 글들을 다음(Daum)카페에 하나씩 올려놓으면 보이지 않는 나의 생각의 단초들은 하나의 나무로 성장한다. 다른 이들의 고민과 나눔의 양분을 받은 나의 정신은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자라난다. 가끔은 소재를 잡아 글을 써보기도 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산고 속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저런 상념을 끄적거리는 것이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 반문을 해보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나의 분신을 남기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가는 즐거움, 자라나는 기쁨

Have you gazed out on the ocean Seen the breaching of a whale? Have you watched the dolphins frolic in the foam? Have you heard the song the humpback hears five hundred miles away Telling tales of ancient history of passages and home?

I want to live I want to grow I want to see I want to know I want to share what I can give I want to be I want to live

-  John Denver, I want to live 중에서

유학생활이라고 해서 공부만 하라는 법은 없다. 틈틈히 남는 시간은 그냥 보내기 아까운 귀한 하늘의 선물이다. 이곳에서 경험하는 공부와 취미생활 우리들에게 자라가는 기쁨을 선사해준다. 생명을 소유하여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 삶이 고통이라지만 문득문득 느끼는 살아가는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신 보상인 듯싶다. 성실한 노동 뒤의 달콤한 휴식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안식일 것이다. 세상은 넓고 내가 공부하고 있는 주제는 세상의 단한면이므로 곳곳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려면 세상을 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고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성프란채스코처럼 영화를 보고 몸을 움직이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면 과장일까? 안식과 일 모두 주님의 손에 달린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해 살아가는 즐거움, 성장하는 기쁨을 주신 주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풍요가 넘치는 삶을 위해 오늘도 정진한다. 또 다른 배움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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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스타 2004년 1월호

도자기 하나를 굽기까지 여러 과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흙을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 안에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손으로 주무르고 두드리며 다져 줍니다. 그리고 모양을 내기에 적당한 수분을 더해주며 물레를 돌리며 형태를 잡아갑니다. 이 때 너무 건조한 흙은 단단해서 기포를 없애기가 힘들고 너무 습한 흙은 모양이 잘 변형되기 때문에 적당함을 유지하면서 작업하는 요령을 터득해야합니다. 물레를 돌리기 전에 어떤 그릇을 빚을 것인가 계획을 가지고 시작할 때도 있지만 무작정 시작하고서 마음가는 데로 손 가는 데로 만들기도 합니다. 마치 즉흥연주를 하듯이 그 때의 기분이나 흙의 기초 작업이 되가는 정도에 따라 계획 없이 만드는 과정은 미지의 완성품을 기대하게 하는 즐거움을 줍니다 .

어떤 때는 머릿속에 완성된 그릇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스케치까지 해놓고 시작하지만 중간에 실수를 하기도 하고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서 중간에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릇을 빚는 과정 외에도 건조, 다듬기, 문양 넣기, 초벌구이, 유약 채색, 재벌구이의 여러 과정과 긴 시간을 걸쳐서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도자기가 탄생됩니다. 이중 어느 과정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굽는 과정에서 균열이 일어나기도 하고 유약이 골고루 입혀지지 않거나 예상과 다른 색을 나타내기도 하고... 한 과정 과정마다 최선을 다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나 정직하게 드러나 버립니다 .

모든 과정이 다 그렇게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물레를 돌릴 때 흙의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빠른 속도의 전기 물레를 돌리다 보면 조금만 중심이 기울어져 있어도 흙이 밀려 나가기도 하고, 억지로 계속 만든다 해도 그릇의 균형이 맞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간신히 마무리지어 놓아도 그릇의 두께가 고르지 않게 어느 한쪽 면이 두껍거나 입구가 너무 넓어지게 되어 흉한 모양이 되거나, 바닥이 기울어지는 불안정한 그릇이 되어버립니다. 수분의 정도는 조절할 수도 있고 물레의 속도나 건조 정도도 조절이 가능한 것이며 채색이 맘에 안 들면 다시 칠을 할 기회도 있습니다만, 중심이 잘못 잡힌 그릇은 나중에 어떤 노력과 재주를 부려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높이가 좀 있는 그릇을 만들려면 더욱 중심의 정확성이 요구됩니다. 높고 커다란 그릇을 아름답게 균형 잡히게 만드는 가장 필요조건은 정확한 중심점을 찾는 것입니다.

중심만 확실하게 잡히면 그 이후의 과정, 즉 모양을 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가 됩니다. 그런데 도자기를 만들 때마다 가장 힘들고 좀처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중심 잡는 일입니다. 경험이 있으신 분은 아마 빙그레 웃으시며 동감하실 것입니다. 이 문제는 살아가는 모든 과정에도 역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건조하지 않게, 너무 습하지 않게 적당하게 부드러운 흙을 만지듯이, 마음의 상태도 너무 강퍅하지 않게, 너무 감상적이지 않게 온화하고 적응력 있는 상태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든 판단에 있어서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함을 지키는 일이나, 요즘 같이 기존의 윤리나 도덕개념이 파괴되는 시대에 가치관을 정립하는 일은 스스로 늘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어렵고 민감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럴싸한 이론으로 위장한 거짓 진리가 만연하고, 인간보다는 물질이 가치를 더 부여받는 이 혼란한 시대, 빠르게 변하는 각종 이론의 충돌과 지나친 인본주의의 주장으로 모든 것이 무가치하거나 모든 것이 수용되는 극단적 모순이 공존하는 이 시대에 현기증을 느끼곤 합니다. 어디에 내 삶의 중심을 세울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중심을 잡고 다양한 삶의 현장에 적응할 것인가, 바로 그것이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살면서 실패도 하고 뜻하지 않은 곤경을 겪으며 계획과 꿈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될지라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중심점이 확실하다면 좌절과 포기 없는 성실한 삶을 살게 되겠지요. 자전거를 탈 때 중심을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듯이 말입니다.

중심을 잡는 일이 어느 순간 예리한 직감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중심점에 다가가는 것일 것입니다. 감정의 통제에서 번번이 실패하고 어떤 판단 앞에서 망설이고 이리 저리 휩쓸릴 때마다 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철학이나 이념도 확실한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고 공허한 사념의 고민을 갖게 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고민은 지적인, 정신적인 성숙을 하게 해주는 가르침을 주었기에 귀한 것이지만, 실제적인 삶의 지혜나 영적인 깨달음이나 성숙한 자아를 갖게 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에 조금씩 다가가고 매일의 큐티를 통해서 말씀을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 어디에서 중심점을 찾아야 할 지 조금이나마 깨달아 가는 것 같습니다. 새해에는 그 중심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를, 매일 매일의 삶이 확실한 중심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운 그릇으로 변해 가는 모두의 모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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