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하는 크리스천’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 해봄직한 질문이 있다.'내가 개발하는 기술 혹은 발견하는 자연 원리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인가?'하는 것.이 질문은 순수 과학을 연구한다 하여 비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며,주가 지으신 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기본적인 목적과도 결부되어 있는 '기저 질문' 이다.세상의 모든 것이 주께서 정하신 목적이 있듯, 우리가 자연을 탐구하는 일도 마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일관되게 우리 주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수행하는 과학은…그 기본적 목적에 합하는가?혹시 너무 한쪽 - 부자 - 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하나님의 관심사와 얼마나 유사한가?세상을 대신 맡은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적합한 방향을 취하고 있는가?이러한 고민들을 부족하나마 함께 나누고자 한다.
GTM 900 정치학 분야 : 이인엽
국가주의와 그리스도인: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역할
이라크 전쟁 파병 결정, 한미 FTA 체결, ‘경제 살리기’를 내세웠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등,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이슈들의 뒤에는, 국익을 최 우선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문제가 있으나 국익이라는 현실을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다’는 이런 논리는, 극우나 극좌의 논리보다도 더 큰 파급력으로 우리의 현실을 규정해 온 것이 사실이며, 크게 볼 때,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 등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내부적으로 약자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내부 비판세력을 억압하며, 권력의 비민주성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일방적인 선으로, 타자를 악으로 규정하며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 하고, 우리의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역사적으로 일제시대와 6.25,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일방적인 친미, 반공, 보수적 사고를 내재화 하고, 정치 권력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 혹은 그에 대한 헤게모니적 장악과 같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한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의 율법서에 나타난 계약사상, 선지자들의 권력과 불의에 대한 비판, 예수님의 비폭력주의, 성령강림의 해방적 함의, 초대기독교인들과 로마제국과의 관계, 요한계시록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간략히 살펴보고, 성경은 물질적 축복과 세속적 성공인 ‘잘 살아 보세’가 아닌, ‘올바로, 정의롭게 그리고 평화롭게 살아보세’를 외치고 있으며, 화해와 평화를 추구 하고 있다는 것에 기반해,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싶습니다.
GTM 1000 경제학 분야 : 신자은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Theory and Practice
공산주의라는 역사적인 실험이 실패로 드러난 이후, 전세계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의 틀 아래에서 빠르게 진화해나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극대화 추구와 시장의 기능을 통해서 모든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있다는 neo-classical economics의 이념은 이러한 초자본주의의 흐름에 부응하여 Academia와 실물경제 모두에서 주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편, 국가간, 사회계층간, 지역간의 빈부격차 문제, 식량문제, 그리고 environmental injustice 는 더욱 심각해져만 갑니다.
경제 영역에서, 연구자로, 경영자로, 정책결정자로써 활약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치의 conflict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우리의 선택과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경제영역의 주도적 세력으로 각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소명을 온전히 이루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본 세미나는, 성경적 경제관을 바탕으로 현 경제구조와 흐름을 진단해보고, 성경적 경제관을 직업과 학문에서 구체화하는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나의 삶 가운데서 구현가능한 형태로 발견해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GTM 1100 행정학 분야 : 최유진
성경적 정책결정 (Bible-based decision making): 인간의 결정 vs. 하나님의 생각
행정 및 정책 연구자들의 연구 범위는 그 어느 학문보다 넓은 것 같습니다. 사람(labor force)을 연구하기도 하며 때론 사람들의 집합체인 조직(organization)을 연구하기도 하고 그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물질(finance)을 연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의사결정, 환경, 복지, 도시 등 정말 연구의 대상은 무궁무진합니다.
행정 및 정책 연구의 본질은 “공공의 가치” 혹은 “공공의 이익 추구”라고 할수 있습니다. 나 자신 만이 아닌 이웃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성경적 세계관과 닮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배제된 공공에의 관심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정책 수예자만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정책의 본질이 되어 인간의 배를 불리우지만 영혼은 매마르게 합니다. 과연 공공의 관심과 하나님의 관심이 다른 인본주의의 막장 시대에 행정 및 정책연구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 딜레마에 대한 본질적 해답은 어쩌면 불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고민까지 멈출순 없습니다. 광역 단위의 정책결정이 미치는 삶에 미치는 영향을 우리는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같이 고민하는 동역자를 찾고 싶습니다. 서로의 연구주제 속에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신지 나누고 싶습니다.
GTM 1200: 음악분야 : 배윤영
음악부문 tm kosta 에서는, Christian음악인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갈지 함께 모색해보고자 합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보다 등수와 점수, 스타성이 인정받는 이 경쟁의 현장에서 우리의 신앙을 지켜나가며, 복음을 나누는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음악계의 모습, 나의 모습은 무엇인지 함께 토의하고자 합니다. 비교의식, 열등감, 자만심, 완벽주의 속에 개인주의가 자리잡은 이 음악계의 현실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역류하며 살아가야 하는 Christian Musician들이 tm kosta를 통해서 혼자만 또는 각 학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전 미주지역에 퍼져있는 지체들을 만나게 될 것 입니다. Competition, audition 등의 제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승리는 무엇인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영역에서 무엇을 주님이 창출해내길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토의하고자 합니다. 현재 미국전역의11 곳의 음악학교의 캠퍼스 사역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음악이라는 tool을 가지고 앞서서 선교사로 살아가시는 분들의 이야기도 나누려 합니다.
GTM 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 유상준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기후변화와 자원고갈, 그리고 환경오염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에너지를 포함한 자원은 그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에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토양은 필터기능을 상실했고 바다는 쓰레기국이 되어가고 있다. 유기농이란 농약 이외의 오염물질에 노출된 농수산물로 정의가 바뀌어야 할 판이다. 모두가 우리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결과물들이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현존하는 지구환경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3)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GTM 1400 종교/신학 분야 : 김상권
청년 크리스천의 교회론 깔끔하게 다지기
교회가 만든 청년들을 다 어디로 갔나? 전통적인 교회론에 입각한 한민족 공동체의 100년 역사는 청년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고 말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다가올 미국교회, 유럽 교회의 ‘급속한 쇠퇴’라는 우려를 짐작하는 기성세대만을 남긴 채... 이제 그리스도께 헌신한 청년들이 만들 교회는 다음 세대들인 또 다른 청년들을 교회 안으로 다시 초대할 능력을 갖출 수 있을까? 왜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는가? 다음 세대를 대변하며, 다음 세대 교회를 책임질 청년들에게 교회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현재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변종 바이러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주께서 피값으로 사신 그래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 전통적인 교회론의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보고, 오늘 날의 교회에 대한 청년들의 생각들을 나누며, 꿈에 그리는 그 교회와 다음 세대 교회관을 정립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교회에 대한 그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GTM 1500 Tent-making : 박나영
Tent-making
기독교 선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선교방법론과 전략에 있어서 더욱 구체적이며 효과적인 형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적 흐름아래 대한민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기독교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선교 핵심 국가로 자리잡았습니다. Tent-making은 현 시대에 효과적인 하나의 선교전략으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타문화 권에서(Cross-cultural countries/settings) 선교사적 사명과 부르심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전하고 나누는 선교 형태입니다. Tent-making이란 무엇인가 성경적인 (Biblical) 관점과 선교적인(Missiological)관점에서 조명하고, 왜 Tent-making 사역이 현 기독교 선교에 효과적인지- 이 선교 전략의 효과적인 특징들과, 실제적인 Tent-making사역의 예 들을 살펴보고, 또한 Tent-making선교 전략에 대한 토의점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자신의 Career와 직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고자 하시는 분들, 또 타문화 지역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자신의 직업과 삶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을 환영하고 함께 이 주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GTM 1600 의료분야 : 채영광/김용정
Healthcare as a Mission
Healthcare 분야의 최전선에서 사역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넘어야 할 내적 외적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환자의 모든 요구를 제한적으로밖에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적 제도적 한계에 좌절하는 순간들이 있는가 하면 내적으로는 매일 매일 일상에 함몰되어 환자 한명 한명에 대한 compassion을 상실하게 되는 정신적 영적 권태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본 세미나에서는 Healthcare 분야에서 필연적인 이 내적 외적 '환난' 속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용기'를 가지고 Healthcare를 주님 주신 'Mission'으로서 회복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현재 healthcare 분야에 계신 분이나 healthcare 및 의료선교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모두 함께 Healthcare 사역자가 어떻게 '예수의 평화'를 전하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GTM 1700 생물학분야 : 김성중/김병재/이성일/이지혜/한상진
the second calling
문제의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하신 것은 이방 민족들의 침노 받은 땅을 정복하고 거룩의 땅을 회복하시고자 함이었다. 우리의 학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으로 나아가기 위한 광야 훈련이라고 할 때, 우리를 통해 되찾고자 하시는 거룩의 땅은 어디이며,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는가?
초 록: 주님께 부름 받은 우리는 성도로 제자로 하나님의 가족이란 동일한 아이덴티티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각각 다른 땅과 영역이 주어졌듯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기 위해 삶으로 섬기고 감당해야 할 영역들은 다양하다. 본 TM에서는 먼저 이 시대에 생물학 영역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떤 소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그 소명이 하나님 나라에서 갖는 의미와 비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자 한다. 아울러 진화론과 같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과학계의 이슈들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의견과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눌 내용들:
1)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소명
2) 진화론에 대한 크리스챤 생물학자들의 견해
3) 성경적 관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researches
GTM 1800 경영분야 : 조성문
크리스천 기업 경영과 롤 모델
1. Discussion
* Job and Mission: What does it mean to find 'vocation'? 하나님의 사역과 내 job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 MBA란? Business School과 Christian Life를 연결하기
* 성경적 기업 경영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배우는 성공적 사업 전략? 예)욥기 22:21-30,요한복음 4:13~15,고린도전서 10:31-33
2. Sharing
* 주변 사람, 또는 유명인 중 진실된 Christian인 동시에 성공한 business person 의 이야기 공유하기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는 크리스천):
o 예) John Wanamaker (세계 최초 백화점 창시자),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 강영우 박사 (3C 혁명 저자), 황성주 목사 (이롬생식 창업자), 김성오 (메가스터디 대표, '육일약국 갑시다' 저자)
GTM 1900 예술분야 : 임채석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크리스천 예술인들의 가져야할 바람직한 Art Management 이야기
음악, 미술, 공연 등 수 많은 예술관련 크리스천들은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을 지를... 이 세미나는 특별히 예술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 젊은 청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귀한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영 Flow를 통해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도 예술의 필요성과 전문성을 요구하고, 그에 맞는 경영기법을 연구,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어렵고 힘든 곳. 예술 세계에서 우리가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고민해야 할 지를 각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혹은 공부하는 우리들이 그 방법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 청년들이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 지를 같이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준비하였습니다. 폭 넓은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고민하는 부분을 놓고, 현재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경영 과정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곳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며 살 수 있을지 같이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그나라는시간개념으로는미래의것이지만, 현재의역사속으로역행해서들어왔습니다. 놀라운일이죠. 원래는구약시대에는그것이인류역사가진행되는가운데, 여호와께서전격적으로임재하셔서유태인이갖고있는 the Lord day 개념인데 (주의진노의날의개념).
Here and now 의개념으로현재역사속에역행하여침투해서들어왔습니다. 겹치는부분의초기그리고끝 already but not yet, 곁치는첫부분에십자가가있습니다. 십자가는역사의중심입니다. B.C. 와 A.D.의중심이되는것입니다. 이세계역사, 예수믿지않는사람들도쓰는용어를봐도예수그리스도가중심에있음이보이시죠. 오직십자가의빛만이이전의세상을해석해주고, 십자가이후의날을해석해줄수있습니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둘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2강(수요일)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오늘 주제강의 두번째 시간에서는 이번
KOSTA의 주제말씀중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을 살펴본다.
고통의시대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히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악, 고통, 재난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연대성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이러한 아픔과 눈물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된다.
또한, 문화, 역사, 뉴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임을 발견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움과 선함, 참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들어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악, 반창조 혹은 반생명의 증상이 발생하여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하므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총을 부어주심으로 이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의 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쁜 사건, 내가 지은 나쁜 죄가 아니라, 엄청난 세력, 즉 유사인격 혹은 하위 인격처럼 거대한 사람과 같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창조세계와 인간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악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오늘날 악이 훨씬 강하고 많다. 활로 했던 과거의 전쟁과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현대의 전쟁을 비교해보라. 또한, 인간성의 황폐, 물질주의의 기승으로 사람의 가치가 그가 가진 물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는 과거에 별로 없었다.
세상, 곧죽음을이기신예수님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실 때, 세상이란 무엇이고 이겼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자.
‘세상을 이겼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혹은 복음 전파로 이교도에 대한 승리 혹은 개종? 질병과 굶주림의 정복?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무엇을 이겼다는 것인가? 한 마디로, 죽음, 곧사망을이기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은 단순히 그 분이 죽은 몸에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fact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저주가 끝까지 계속되었을 때 일어나는 사람과 피조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것이 저주임은 어제 살펴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우리들을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저주
– curse를 퍼붓는 것이 아니라
– 이다. 이것은 마치 태중의 아기가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된 상태에서 영생의 복을 항상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탯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죽어가고 또 죽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이다. 이로부터 모든 악의 증상들
– 미움, 증오, 시기, 질투, 폭력, 파괴와 같은
– 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 그로 인한 극심한
– 죽을 것 같은
– 고통, 가난과 질병, 공해, 자원고갈, 환경오염 이 모두가 죽음의 증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격적인 죄로 말미암은 것들, 이것을 사주,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사탄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악의 세력은, 모든 인간이 지은 죄를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사탄이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죄로 시작된 모든 죽음의 증상은 사탄을 통해서 증폭되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 그러하다.
악, 곧 모든 죽음의 증상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살후
1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안식, 곧 완벽한 샬롬’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되어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자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돌이켜 회개하면 샬롬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지만, 그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가 다시는 없다. 또한, 하나님과의 거리는 불가역적으로 무한히 멀어진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죽음의 증상에 고통스럽게 시달리다가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되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 샬롬, 부활, 구원과 같은 성경의 위대한 언어를 이해할 때, 도덕적 죄의 회개와 죄사함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로 파괴되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악을 다 몰아내시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샬롬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꿈. 그 꿈의 한 부분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한 꿈이 이루어진 상태를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제 나 혼자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과연 이 우주에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졌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세력의 극치, 악의 극치, 악의 세력의 궁극, 즉 죽음을 이기셨다는 의미이다.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 귀신을 쫓으심, 바다를 잠잠케 하심은 모두 예수님의 악의 세력을 잠재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자. 내가 만지면 옮는데,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병이 낫는다. 즉, 악의 결과, 죽음을 정복하는 힘을 미리 십자가 이전 부터 과시하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결정적이로 최종적으로 그 세력을 없애셨다. 십자가의 사건은 실제적,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사건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며 악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가? 로마정부의 하수인 빌라도, 식민통치 정부 헤롯왕의 하수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권력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세대의 권력자들, 힘, 악한 정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강한 힘들을 상징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를 포위했다.
그리고 유대인 군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하나님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인본주의라는 말이 선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을 지칭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있음, 내가 나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대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들이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왕,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된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를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19:15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고 소리쳤다. 창조해주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혹 있다고 하여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타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마태복음27:40에서,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로 도전하였다. 이것은 사탄이 마태복음
4:6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 던졌던 도전이었다. 즉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를 애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악의 세력들, 인류 역사 이래 그리고 십자가 이전 모든 세대,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모든 악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자기 존재와 인격의 안에 고스란히 다 받아서 죽음으로써 그 악의 무섭고 가공할 힘을 소진시켜 버리신 것이다.
십자가와가시관
십자가위에 가시관을 쓰시고 달려계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방법중 가장 잔인한 것이어서,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국가반역죄인,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꾀한 자에게만 가했졌던 로마의 극형이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여러 날을 매달아 두면 서서히 피를 흘리며 팔레스타인 땅의 낮 태양의 뜨거움과 밤의 무서운 추위가운데 죽어가게 하는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독특하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다.
‘가시’는 에덴동산에서
“이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다. 곧 이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관은, 세상의 모든 악이 예수의 인격과 존재위에 얹혔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마태복음27:51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소과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 이 휘장은 소 두 마리가 당겨야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두껍고 튼튼한 장막이었고, 금색실로 그룹, 즉 하나님의 천사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룹은 창세기3:25에, 하나님의 샬롬에서 인간을 추방하실 때 죄인은 샬롬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지킨 문지기, 하나님의 천사이다. 성소의 휘장이 찟김으로 이제 그 문이 열린 것이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샬롬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라고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이 죄목에 해당하는 형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로 맞아 죽으시게 되면, 핍박받는 선지자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될 것이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어 알고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네’라고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로마 반역죄, 즉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거짓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 간교한 생각을 완벽하게 역이용하셔서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 부어서, 우리를 그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섭리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부활로성취된샬롬의시대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한 모든 메시지가 모호해진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죽으셨고, 장례까지 치루어져서
3일이 되셨다. 육체가 썩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셨다
(로마서1:3-4).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즉 구속사의 두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창조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첫 창조의 시대, 즉 육의 시대와, 부활 후의 시대, 새 시대, 즉 영의 시대, 성령님의 시대인데, 이 영의 시대는 첫 창조의 시대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이 영의 시대를 준비하셨고 여셨다. 그리고 들어가셔서 첫번째 주민이 되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아직 실존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민등록이 옮겨진다. 우리의 실존도 언젠가 이 새 시대, 샬롬으로 충만한 나라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새 시대, 영의 시대는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하고 다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 속으로, 미래에 있을 영의 시대가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 이것이 바로 샬롬의 나라의 이중구조이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릴 것이나, 그 중간, 재림 전까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샬롬을 누릴 수 있다. 즉 “Already,
But not yet”.
그래서 이 시대에는 예수님의 샬롬의 나라와, 살기등등한 이 세상나라가 겹쳐있어서 우리는 크리스챤이면서도 부득불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궁극적인 힘이 없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결정적으로 소진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증상, 질병, 장애, 실패, 두려움, 자연재해, 사고등을 인류의 연대성가운데 우리도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최종적인 결과인 죽음이 완전히 소진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2:14-15 은 인간의 실존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해준다.
“죽기를 두려워 일생에 종노릇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증상들인 고통을 경험할 때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두려워한다. 그것이 죽음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를 받을 때, 모든 악의 현상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의 본질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의 가장 자명한 증거는, 바로 먹고 사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확실히 소진시켰음을 믿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로 하여금 죽기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이 나타나면 이제 힘은 들지라도 두렵지 않다. 자유롭고 용기 있게 살게 된다. 즉, 부분적인 제한적이나마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영의 시대, 새 시대의 완전하게 누리게 될 샬롬의 첫 열매, 맛배기를 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크기 때문에, 샬롬의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영혼에 오게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충분히 살아지고 나누어 줄 수 있게 까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하라 용기를 내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혹 못 가질 지라도 우리는 노심초사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끌어당기면서 살기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 빼앗아 먹기 위한 작은 탐욕으로 인한 다툼과 전쟁이라는 매임에서 우리는 해방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진 자유함과 샬롬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복지, 즉 샬롬을 위해서 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샬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샬롬이 없는데 내가 죄용서 받았고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식의 구원의 개념은 일그러진 것이다. 나와 모든 사람이 전체성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이 구원을 구체적으로 누릴 수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적으로 누리게 되는지는 내일 다루기로 한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첫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1강(화요일):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요 16:33 b)
같이 기도 드립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송축합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기뻐하며,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신지
계시의 말씀을 통해 배우게 하시되, 비록 인간의 메신저를
통해 말하는 것일 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슴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3일
동안 이번 코스타 수양회 중심 성구인,
요한 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같이 강해하고
살피게 됐습니다. 이 말씀 짧은 말씀이지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중간 부분을 오늘 살피고, 그 다음에 마지막
부분을 내일 살피고, 오히려 첫번째 부분을 글피에
살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헬라어 본문으로는 우리
한국 번역과 순서가 같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논리
순서를 조금 바꿔 봤습니다. 우리 본문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시작,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제가 어떤 신문 칼럼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모두가 귀 막고 타협 없이
자기 말이 옳다고 막무가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우리
정치가 그 꼴이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은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통령부터 그렇다. 자기만이 옳다며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 세상에 혀를 찬다. 여당도 지리멸렬이다. 할 일도 많고 갈 길도 바쁜데, 집안 싸움에서 못 벗어
난다. 야당 역시 가관이다. 법치를 무시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며 죽은 전직대통령에게 기숙하는 수준이다.
교수 사회, 시민 단체, 각종 이익 단체들도 오로지 자기
주장에만 매달린다. 만인이 만인의 적이다. 모두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야단이고, 조금만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면불구 하며 으르렁 된다. 여기
저기서 적개심이 난무하고, 촛불이 횡행하며 서로의 생명 줄을
끊으려고 광적으로 돌진한다. 북한을 놓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다 싶히 하고, 거기다가 남과 북은 이제 바야흐로
마주 보고 달리는 괘도에 올라 탔다. 안에도 적이고
밖에도 적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소통, 이해와
타협, 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다. 이것은 정치
권력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이 무너진
상태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회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무너진 상태이다. 우리에게는 제 삼의
길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리더십의 부재, 삼지 사방으로 흩어진
민심,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지도층의 욕심, 오직
반항과 파괴로만 일관하는 저소득측의 비 타협이 난무
하는 사회로는 바람직한 21세기로의 진입이 어렵다.
우리는 우리를 만인대 만인의 싸움에서 구해줄 진정한
개도론자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런 개도론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모의 공포증 없이, 마이크의
소음 없이, 욕설 섞인 저주 댓글이 없이, 매일의 안정된
생활에 매진하는 화목한 사회에 살고 싶다.
여러분 이게 뭐 한겨레 신문의 칼럼인지,
또 조선일보 칼럼인지 머리를 굴리지 마시고 그대로
잘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간 역사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너무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한 시대 입니다. 자본주의 한계가 막 드러났고, 그렇다고 공산주의 실험을 다시 해볼 수 없는, 아주 어려운 그런 상태 이죠. 여러분이 노인이 되는
40년쯤 후가 되면은 국민의
5명중의 한명이 노인이 됩니다. 그리고 국민
4사람이 한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처지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출산율이
1.1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 그리고 어쩌면 이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될 여러분들이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읽고 계시는지.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졸업을 하면 금방 조국 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또 세계 현실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늘어가는 지구촌의 인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어떠한지 인류가 역사 시작 이래 항상 추구해 왔던 샬롬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우리가 이 타락한 피조 세계 속에서 악에 지쳐 있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세상을 이길 힘을 우리 스스로가 갖고 그런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 주제가 샬롬 입니다. 샬롬은 평화 혹은 평강으로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 주로 나오는 평화의 원어는 에이르네라는 헬라 말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피스죠. 평화, 평화라고 말을 하면 즉각적인 우리의 인식이 전쟁이 없슴, 편한 사이,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 혹은 어제도 우리가 배웠지마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피조세계와의 원만한 삼중구조의
관계를 우리가 평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샬롬이라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이에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샬롬은 조금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아야만 이번 수양회 주제를 소화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샬롬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성경 언어를 먼저 조금 공부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마음속과 머릿속을 싹 지우고
백지 상태로 만들고, 여기에 여러분의 개념을 한번
잘 써 보세요. 성경에는 초장부터 복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창세기 1장 22절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많은 생물들과 공중의새들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들을 바닷물에 그리고 땅에 충만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물고기와 새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창세기
1장
26절에서
28절, 그 유명한 인간을 창조하신 구절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물론 뒷날 신학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같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럴 때 우리를 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성경적인 개념의 복이 뭔가 blessing, 우리는 복 하면
금방 가지고 있는 기존 개념을 버리고, 복이라는 것은
새나 물고기를 비롯한 생명체, 모든 인간을 비롯한
인간과 동물과 같은 생명체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힘을 복이라 그래요. 사람을 중심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가장 인간 답게, 가장 행복하게, 정말 땅속에서
물을 함뿍 빨아 들인 장미가 활짝 피어나서 그 아름다움을
백 퍼센트
들어내기에 충분한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지금처럼
타락하고 망가진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많은 뜻이 있지만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한가지는 동상 같은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왕들이 자신의 통치권을 들어내기 위해서 자기 나라
곳곳에 자기 왕의 상을 둬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마다 '아 이 나라를 저 왕이 다스리는 곳이구나' 이렇게 깨닫도록 한 것이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할 때, 그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 하신 후에, 다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지만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리자로 세우셔서 다스리도록 작정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많은 생물을 창조 하셨지만, 그 중에
인간을 창조 하실 때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대권자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걸어 다닐 때 다른 많은 피조물들이 볼 때, 우리를 보고
생각하기를 '아 이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구나'
깨닫도록 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뜻이에요.
또 한가지는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세분이굳이 셋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연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존재하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살려면 뭐가 필요해? 그냥은 안돼. 그냥은 안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생명력을 주셔야 되요.
그 생명력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신비롭고 거대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복은 모든 생명체가 가장 복되고 가장 충만하게 가장 깊고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생명력이 그 복이라는 것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생명력을 부으실 때, 우리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produce 해요. 창출해요. 뭐냐 하면,
뭐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육체적인 생명, 또 자손의
번성함, 또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 올 수 있는 능력들,
또 육체적인 힘, 성실함, 지구력, 창의력, 집중력, 용기, 지혜, 모험심, 인내심, 희생정신, 용서하는 마음, 상상력, 심미적 능력, 열정, 동기, 의욕, 관대함, 지적 능력, 감성적 깊이, 의지력, 예술 감각, 뛰어난 운동 능력, 몸과 마음이 아름다움, 또 사랑과 인정 받음과 자존감과 존귀함과 원만한 인간관계, 그리고 초월적인 존재를 열망하고 나도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 이게 뭡니까?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필요한 삶의 자원들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부라카' 라는 히브리말 '부라카' 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복중의 복, 복의 핵심은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복의 DNA에요. 세포가 있으면 세포의 생명을
DNA가 주장하듯이, 복의
DNA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들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함과
복을 받았다는 것을 같이 생각했어요. 창세기 26장 28,9절에 보면은 이삭,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블레셋에 그랄 땅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블레셋 민족들과 좀 갈들이 있게 되요.
그러나 오랜 갈들에 있다가, 그 나라의 왕,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우리 이제 앞으로 사이 좋게 지냅시다.'왜? '내가 당신의 삶을 본즉,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보았소. 당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라는 말과
복을 받음이라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자 복은 그런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은 처음에 복과 그 다음에
의로움과, 세 번째는 하나님의 언약인데요. 의라는
말, 의는 한자말로 찾아 보면 '옳을 의'자, justice, 옳음,
옳고 그른 일이 있는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선하고 틀리지 않은, 악하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가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죠. 로마서
3장
23절4절에 보면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때, 구원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 용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이라는
헬라말은 원래가 법정 용어에요.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법정 용어로써, 어떤 사람을 취조해본 즉 죄가 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조치를 취한 다음에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무죄 선언 하는 것을 의롭다 함이라고 말해요. 그런 이제 전통 때문에 우리들이 로마서에 특히 나오는,
특히 로마서 5장 1절에도 보면 ‘그런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원래 의롭지
않았어요.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불의, 죄를 많이 졌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를 대신 벌
받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것으로 최종 판결을
하고 무죄 석방 됐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은 사실은 그것을 포함하고 훨씬 더 깊은 뜻이에요. 그것에만 머무르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내가 또 죄를 지으면 나는 죄인이 다시 됐다가 의롭게 됐다가, 왔다 갔다가 하느냐 그것이 아니고, 이것도 이제는 포기라는 개념에서 했던 것처럼, 싹 여러분의 노트를 다 지운 다음에 새로 정리해 보세요. 의라는 말은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올바른 관계.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의롭다는 말은 내가 관계가 갖고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부를 충실하게 감당할 때 의롭다라고 말해요.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자식을 잘 돌보고 양육할 때, 의로워요. 그러면 자식은 어떠한게
의로운가 하면은 아빠 엄마를 잘 의지하고 아빠 엄마
말을 잘 듣고, 그 혜택을 받아서 무럭 무럭 잘 자랄 때, 의롭다 그래요. 그래서 이 성경에서 ‘의롭다’
라를 말은 철저하게 관계적인 말이지 객관적인 어떤
기준 이것은 옳은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의롭고 그것을 못 지켜 죄를 지으면 불의 하다. 그런
개념도 물론 있지만, 훨씬 더 깊어요. 관계적인 개념이에요.
관계적인 개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못할 짓을 해도, 하나님 한번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끊임 없이 우리를 우리에게 다가 오세요. 여러분이 인생에 많은 순간에 여러분의 인생을 계속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뿌리쳤지만 그러나 끝내 따라와서 여러분을 잡고 항복 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의로우심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 받으신 것이에요. 그 의롭다는 말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고 사랑하여 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로써의 모든 사랑과 복락을 배푸시는 관계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로워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느냐, 그분을 신뢰 하는 거에요. 우리가 착하게 살고 죄를 안 짓고
하는 것은 그것은 두 번째 문제고, 훨씬 더 먼저, 그 하나님을 받아 들이고,
내 하나님, 내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의롭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허물이 있고, 많은 죄를 지었고, 여전히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죄를 다 멈추지는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고 아무리 노력해도 선과 악의 변증법적인 이분론 속에서 뱅뱅 돌다가 죽게 됩니다. 살아 숨시는 동안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 관계 속으로 집어 넣으셨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어서 새로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떠났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관계가 있었어요. 그 관계를 아담 이후에 인간이 박차고 튀어 나와서 관계가 깨트려 졌는데, 그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justify’,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신실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일단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설혹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가 다시 어그러져서 튀어나오는 법이 없어요. 왜?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너무나 큰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금 돌아가 앉아 있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 관계를 조금 어려운 말로 성경에서 언약적관계다 이렇게 말해요 언약적 관계. 언약이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나라말 번역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썼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약성경,구약성경은 옛날 약속, 새로운 약속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책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신약 구약을 갖고 계시죠. 그런데 언약이라는 말은 또 굉장히 기가 막힌 얘기에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으로 꽉 차 있어요. 그 언약의 선포는 이것입니다. 언약은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표현은 간단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 말은 출애굽기 19장, 레위기
26장 쭉 나오고 또 예레미야 31장,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
나오는데, 계속 나오는 말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원래 그러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인간이,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옛날에 한번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으며 모든 인간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슴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어요.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언약을 지키시는데 인간이 박차고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는데, 역사 속에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택하시고
그에게 다시금 스스로가 거부했던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회복해 나가십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가족들에게 하시고, 그의 국가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이제 그 혜택을 펼쳐 나가시는데, 항상 그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에요. 그 말이 뭐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 왜 그런 말이 필요하냐? 아담이, 우리들이 하나님 나 필요 없어 라고 말했거든요. 아담도 그랬고,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가장 죄송하고 가장 큰 죄가 뭐였냐.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라는 것이에요. 죄라는 것은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 자라오면서 뭐 누구 나쁜 짓하고, 누구 미워하고,
누구 때리고 죽이고, 뭐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이런
것이 죄다. 이렇게 늘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라는 말은 사회학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내포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신학적으로 정의해야 해요. 뭐냐,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없다 그러고, 없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믿기 싫다. 하나님 싫어, 그런 것들을 죄라 그럽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내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은 하나님이 주시는 뭡니까. 복, 생명력을 못 받게 되요. 그런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다 보면은 이상하다 내가 예수 믿지 않던 상태를 죽었다 표현하는구나. 물론 그때 내가 예수를 안 믿었지만 살아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죠.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그 생명력 그로부터 복으로부터 계속해서 만들어 지는 생명의 자원들을 더 이상 못 받게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때까지 받았던 복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게
되는데, 우리 인간들은 태어날 때 아담이 마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이미 받았으나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복을 가지고 한 세상을 살았듯이,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 그런 상태로 태어나요. 말하면 죽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물학적인 생명은 가지고 태어났지마는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
1절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너희들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를 살리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적인 관계 속으로 복귀해서 원래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고 또 인간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결코 인간답게
살수 없는
복과 생명력을 다시 받게 됐을 때 그것을 살았다라고 도
말하고 혹은 영생을 얻었다라고 도 말합니다. 같은 뜻을 구약에서는
주로 복이라고 말하고 신약에서는 주로 영생이라고 말해요. 영생이라는 말은 그냥 시간적으로 길고 긴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말은 원래 문자적으로는 오는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 오는 시대라는 것은 우리 지금 타임 테이블로 말하면은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지금 이 인간의 역사는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실 텐데, 그때 누릴 인간들의 삶 원래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때 그 풍성한 삶을
계속 누리게 될 텐데, 그 시대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지금 땡겨서 누리고 있어요. 그것을 이제 내일
우리가 다루게 될 텐데.
자, 그럼 이제 샬롬이 뭐냐 서론이 너무 길죠. 샬롬, 샬롬이라는 말은 우리 안녕하십니까, 굿모닝 하는 것과 같이 유태인들은 아침 저녁 만날 때 마다 샬롬
이렇게 말하죠. 아주 단순하고, 평화로은 좋은 관계 이런 느낌도 있지만 그 깊은 영적 의미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샬롬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은 그런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삶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받아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늘 의로운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언약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놀라운 직분을 감당하기에 가능한
RESOURCE를 늘 받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아요. 창세기 2장 3장에 벌써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반드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 하셨어요. 그런데 샬롬이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그 복과 생명력을 공유하면서 그게 같이 뿌리를 내고 같이 발을 담그고 살고 있는 그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영생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나만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공유 하면서 같이, 같이 그 복을 누리고 사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단어 중에서는
가장 잘 맞는 말이 CONVIVIALITY 는 말은 원래 대잔치 마을 전체 사람이 같이
참여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아까 말씀드릴
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생명력을 받고
그분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들은 소위 말해서
전인. 여러분 전인 교육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전인교육,
전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INTEGRITY가 있는 매사에 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학과 공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음악도, 미술도 체육도 리더십도 가르쳐서 아주 근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을 우리가 전인교육 이렇게 말하는데, 원래 그 전인이라는 말은
개별적으로는 완전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뜻은 타인과 더불어서 잘 살아가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전인이라고 그래요.. INTEGRITY가 있는 사람. 그 전인들끼리
모여서 사는 삶을 샬롬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로는 또 한가지 TOTALITY 전체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제가 여러분의 핸드북에 작은 글을 실어놨어요. 리코스 카잔차스키가 쓴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써서 아주 불경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아주 진지한 구도자였어요. 이런 글을 좀 읽어
드릴께요. 이 사람이 밤에 꿈을 꿨어요. 크레타 사람인데 원래, 크레타 민요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동굴에서 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매를 걷어 붙힌
그의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을 대더니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노래는 그만해요 내가 일하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내 보였다. 뭘 빚으시나요?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동굴에서 나는 구원 받은 자들을 빚어 낸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외치는데 내 가슴속에 옛 상처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이 리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 정교가 국교인 크레타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을 했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 니체도 추종해보고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추종해 보고 나중에는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에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동굴의 노인이 내가 진흙으로 구원 받은 사람을 빚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놀라는 거에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노인이
전체성을 파악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성을 파악하고,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반드시 모여 살수 밖에 없는 그 그룹에 한 사람임을 깨닫는
전체성, 이것을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운 관계, 그리고 동료 인간들 관계에도 의로운 관계,에 머물러 사는 것이 이 샬롬인데, 이 샬롬은 그야말로 너무 너무 좋은 상태, 너무 좋은 상태여서 제가 여러분에게 다 설명을 못하겠어요.
Too good to explain.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좋았더라 라는 단어 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일장을 보면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 하시고 난 다음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하나님이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 그것을 보고 좋았더라,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심히 좋았더라. 이렇게 하시죠. 좋았더라는 히브리말로 ‘토우브’ 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에요. ‘토우브’라는 단어, ‘좋았더라’가 이런 뜻입니다. 즐거운, 유쾌한, 좋은, 선한, 귀한,
탁월한, 적적한, 올바른, 탐스러운, 준수한, 충실한, 후한, 선대, 총명함, 보배로운, 길한, 아리따운, 번영, 복지, 은총, 은혜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샬롬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퀄리티에요. 단순히 뭐 전쟁이 없고, 뭐 좀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라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살도록 지어진 인간들이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더 할 나위 없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치밀함 같이 완전히 연합되어 사는 그런 퀄리티의 삶을 샬롬이라고 그렇게 하고 원래 우리 인간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우리가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도저히 옛날 일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됐지만, 그러나 우리들을 그렇게 창조 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이제 언어 정리가 끝났고.
너희가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들어가겠어요. 이건 짧게 끝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너희가 세상에서, 세상이라는 단어와
고난, 환란이라는 단어 이 두 가지를
잘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세상에서 라고 말하실 때에는 굉장히 슬픔을 담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두시고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굉장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그 속에 있는 것이에요. 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그 모습이 아니거든. 너무나 깨지고,
너무나 망가지고, 너무나 왜곡되어서 샬롬은 커녕 샬롬의
정 반대인 죽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세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뉘앙스로 사용 되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말할 때
우리들은 그 세상이라는 말은 썩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죠. 그러나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할거 없다.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 벌써 나를 미워했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자라면은 너희가 같은 부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나에게 선택을 받아서 빠져 나왔기 때문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이에요. 하나님이 너무나 아름답게 샬롬으로 창조하셨는데 그것을 인간의 범죄로 다 깨어버리고 살벌한 고통과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고통스러운 장소라는 뜻이에요. 동시에 그 세상은 하나님을 적대시 하고 하나님을 몰라라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있어요. 제가 사실은 이번 수양회 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 그렇다 치고라도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들이 외치는 사회개혁을 부화내공 따라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가 굉장히 격분하고 있는 상태에요. 여러분 여기에 아마, 우리나라 용어로 좌파들도 꽤 있을 거에요.
그 좌파들 제가 좀 구박을 할 것입니다. 물론 우파도
구박해요.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양파에요. 저는 민주당도 아니고 한나라당도 아니고 교회당입니다. 예배당이에요. 이 세상의 현실을 보는 해석은 비슷해요. 아 이세상이 악과 고난이 가득한 곳이구나.
이것을 우리가 회복하자. 우리가 탈피하자.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세상이 원래 낙원이었던
때를 기억해요.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paradise 낙원.
그래서 낙원이 있었다가 상실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무어냐 하면, 아담이 인본주의자였어요 처음에.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들은 좋아하나 싫어하나 인본주의자에요. 그 말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나서 하나님 없이 살수도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나 인간 이외에
초월적인 존재가 없슴’을 선포하는 존재를 우리는 모두다 인본주의자라 부를 수 있습니다. 휴머니즘,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이고 인간이 시작이고 끝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치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에요. 인간 인본주의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 하면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은 비슷한데, 그 낙원 개념이 없어요. 그 대신에 이상향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점점 진보하고 인간은 점점 진화해서 점점 좋아져서 마침내 지상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라는 개념이에요. 현실을 보는 시각은 비슷한데, 그것의 해법이 달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인본주의자들은 원래는 없었고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무지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 좋아져서 역사의 진보의 원리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인간은 지상천국,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투쟁하고 우리의 삶을 받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굉장히 비슷하지만 철저히 다른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후자를, 인본주의적인 사회개혁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숭고한 뜻을 품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던지고자 하는 열정이 있더라도 그것은 틀린 것이에요. 왜 그러냐, 우리 인간이 낙원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에요.
인간이 미개 했기 때문에,인간이 원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주하셨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창세기
3장
17절 이후에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저주 하십니다. 사탄, 뱀을, 사탄으로 상징되는 뱀,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과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너는 나의 명령을 어겼슴으로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대단히 위대한 존재에요. 인간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백배 천 배, 위대한 존재, 영광스런 존재로
창조됐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버금가는 그런 존재로 창조 됐는데, 그래서 창세기 2장 초반부터 보면은 소위 에덴동산의 모습들, 너무나 풍성한 삶의 조건들, 그리고 거기에는 큰 강이 흐르고
그 강에서 흐르는 4개의 강들이 온 지구를 덮었다고 말해요. 고대 세계의 세계관에는 강을 떠난 인간의 삶이란 상상 할 수 없었어요.
근데 그것도 무려 4개씩이나 있으니까 얼마나 완전한 삶인가. 또 거기에 보면 아주 좋은 질의 금이 생산되고, 여러 가지
보석이 생산되더라. 이런 얘기들이 창세기
2장 초반에 나오는데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엄청난 직분에 걸맞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허락하셨슴’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좋은데, 그러나 너와 나와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한 개의 선이 있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모든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그 자유는 나에게 종속되어져야 한다. 라는 것이 선악과의 의미에요. 그 선악과를 안 먹으면 그 의로운 관계 속에 머무는 것이고, 그것을 violate할 때,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No Thank you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관계 없슴 선포, 이것이 선악과 먹음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우리가 자꾸 이 성경에서 보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 하셔야 되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사용하는
language를 사용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많은 언어들이 우리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언어로 복구해야 됩니다.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우리끼리 하는 저주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우리는 그냥 확
FFFFFXX 하는 말이 저주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저는 누구보다 욕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거룩한 장소에서 할 수가 없어서 여러분의 풍성한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겠어요. 저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막 따가운 말을 퍼 붙고 이런 것이 아니에요. 그래? 그럼 잘해봐라. 이거에요. Let him go, 그럼 한번 알아서 해봐라. 너가 나 없이 살 수 있다고? 너는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복과 영성을 끊임없이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나를 떠나서 살 수 있다고? 너가 너 스스로에게 하나님으로 살 수 있다고? 한번 해봐라’
이것이 저주에요. 하나님과 멀어짐, 하나님과 멀어짐, 그래서 저주는 정확하게 보호의 반대말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함이 뭐라 그랬어요? 보호 하나님과 멀어짐을 저주.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학자인 김세윤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쓴 조그만 책자, 구원이란 무엇인가? 혹시 안본
분 계시면 꼭 보세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두란노에서 개정됐어요.
제가 왜 두란노 책을 팔아줘야 되나? 거기에 보면 저주에 빠진 인간을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로 표현했어요. 큰 나무가 있는데, 큰 폭풍이 불어서 뿌리가 확 뽑혀 버렸어요. 그러면 그 나무는 금방 죽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큰 나무는 몇 개월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누렇게 되고 메마르게 되고, 잎이 시들고, 마침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적으로 봤을 때는, 그 대지에서 뿌리가
뽑힌 순간 죽었다고 해도 되요. 그러나 아직은 살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죽을병에 걸려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거기는 고난과 결핍들이 있습니다. 자 이세상에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이 바로 고난과
결핍, 죽음의 증상들이에요. 하나님의 저주에 빠진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복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결핍과 고난들의 증상들을 악이라고 그래요 악.
Evil 그런 것이 이런 것입니다. 제가 또 열거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불의, 탐욕, 시기, 질투, 증오, 살인, 다툼, 사기, 악독, 험담, 비방, 모함, 음란, 교만, 악을 도모함, 불효, 신의 없슴, 몰인정함, 무자비함,
또 이제 그것이 때를 지어서 그룹을 형성해서 서로 다투고 당파 짓고,
소외시키고 집단 이기주의, 공직자의 권력 남용,뇌물수수,
인신매매, 고문, 인권유린, 전쟁, 인종청소, 인종 차별, 대규모의 기아, 전염병,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정신적인 물리적인 현상들, 개인과 집단의 이 부정적인 현상들이 전부다 악이라고 말해요 악. 뿐만 아닙니다. 이것이 이제 크게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막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요.
아마 20세기에 가장 엽기적인 사건, 지금 동유럽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일 거에요.
세르비아에는 정교도, 그리스 정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크로아티아에는 침례교가 있었어요. 크로아티아의 침례교들을 다 죽이기 위해, 없애기 위해서 남자들은 다 죽이고 크로아티아의 침례교 여자들을 강제로 임신을 시켰어요. 그래서 한 종족을 말살하려고 시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 또 르완다의 후토와 투치족의 그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완전히 한 명도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들이에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의 600만 명 유태인들 학살 이라던지 또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실험은 약 1억 명 정도를 죽였어요. 1억 명
정도가 죽거나 유형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약 1500만 명
정도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죽였죠. 흑인의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요.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베르뎅과
솜이라는 두 곳에서 1주일 동안 전쟁이 벌어졌는데,
독일군 50만 명과 프랑스군 45만 명이 죽었어요. 하루에 어떨 때는 4-5만 명이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라서
그 기관총 한 자루에 어이 없이 목숨을 잃는 그런
일이 발생했어요. 상상할 수 없어요. 역사책에서 읽으면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는 그 백만 명
가량의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수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에
한과 눈물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라이프라는 이 사진 잡지에서 1차 대전의 이 장면들을 search 한 것을
봤어요. 거기 한 바윗돌에 기념관에 바윗돌에 전사한 청년의 어머니의 말이 불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저는 불어를 모르니까 밑에 영어 번역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My son, 내 아들아, since your eyes were
closed, mine, 내 눈은, 내 눈이 감겨진 후로부터 내 눈은
한시도 눈물을 그쳐 본적이 없다. 역사책에서 보면 솜과 베르뎅 전투에서 45만 50만 명이
죽었다. 이렇지만, 그 깊이 들어가 보면은 수백만 명의
눈과 한이 어려 있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에요. 악. 샬롬이
깨어진, 샬롬이 상실되고 샬롬이 해체 되어 버린, 인류의 현상이 그런 것이고 현재 여러분과
제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개인적과 공동체적인 삶의 부정적이고 팍팍한 모습들은 바로 샬롬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나의 힘과 의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행과 비극이 굉장히 많죠.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질병으로 지체를 잃거나 상해서 연약함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음주운전 때문에 다친 사람들, 너무나 가난하게
태어나서 한번도 유복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임신되었으나 태어나 보기도 전에 성인들에 의해서 중지된 생명들, 또 공해 때문에 담배 한번 피워 보지 않고도 폐암을 걸린 사람들. 수백년전에 내가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갖다 버린 산업폐기물 때문에 오늘날 내가 그 오염된 음식을
먹고 암에 걸리는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의 불행들이에요.
츠나미, 2004년에
2007년에 중국 스촨성의 지진, 이런 것들을 보면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죽어버려. 1755년 11월 1일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그 지진 때문에 평화롭게
교회당에서 예배 드리던 그 도시 인구 30만 명중
삼분의 일이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유럽에서부터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인간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 때문이다. 나의 혹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또 그것을 부추기는 사탄의 힘. 또 우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계를 맡겨 주셨는데, 이 자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반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자연 재해,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악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그래요, 예수 믿어도 우리는 꼭 같이, 혹은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병에서 났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헤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개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세상의 고난에서 다 벗어 난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여전히 환란을 당할 것이다. 물론 그 해법이 이제 내일과 글피에 나오게 되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연대성 때문입니다. 제가
2007년 코스타에서 조금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 한 사람 안에 들어 있게 창조 하셨어요. 사도행전
17장에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지으셨다’ 말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는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한 걸로 카운트
됐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그거에요. 왜 아담의 죄가 나에게 영향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인류의 연대성의 원리, solidarity principle 이라
부릅니다. 하나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가족에 태어난 가족이 있죠. 여러분이 선택합니까? 그 가족의 연대성 속으로 태어납니다. 태어나 보니까 그 아버지가 찢어지게 가난해요. ‘왜 이거 뭐야 이거, 나 딴 집에 태어날래.’ 꼼짝없이 그 가족에 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연대성의 원리에요. 기가 막히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문화, 개인주의적인 문화에 자란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에요. 너희들은 원래 한 가족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너무나 커지고 많아져서 도저히 우리가 가족으로 생각할 수 없는데, 아니 하나님은 너희가 한 가족으로 지어졌다 말합니다.
solidarity
principle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모든 인류와 관계가 있어요.
너무나 약 오르게도, 너무나 약 오르게도 기독교에서 이것을 잘 가르치지 못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것을 먼저 선수를
쳤어요. 공산주의 선언, 세계 공산주의 선언의 중요한
내용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한 모든 사람들의 일은
나와 관계가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 선언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우리가 참 무신론 적이고, 유물론 적이기 때문에 절대고 그것은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과 병행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자기들이 선포를 해 버렸어요. solidarity 그래서 인간의 연대성을
가장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고난의 문제 입니다. 자 내가 병들었어요. 왜 병들었을까요?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간의 고난을 죄의 문제라고 말할 때, 나의 개인적인 죄,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의 내가 고난을 겪는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럴 때가 있지만 그래도 굉장히 적은
것이에요. 굉장히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누가 고난을 겪을 때 가서
‘회개 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안되요. 그거 염장
지르는 거지, 아니 내가 암이 걸리고 막 이렇게 있는데, ‘집사님 아마 회개 안 한
죄가 있을 것입니다. 뭐 은밀한 죄가 있을 것입니다.
회개 하세요’ 이러면 안 되요. 그런 경우는 있지만 아주 드물어요.
인간의 대부분의 고난은 내가 지은 죄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에요. 어떻게 아담의
죄이기도 하고 우리 조상 중에 누가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질병이나 사고나 공해나 자연재해나 그런데 왜 내가 그걸 당해야 해,
왜 왜 당해야 돼요? 어쩔 수 없는 거미줄처럼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 섥혀서 우리가 추적할 수도 없는 연대성 속에 얽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연대성 속에 태어났다는 것을 가장 끔직하게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요. 그래서 여러분 그 고난이 아무리 작은 것이든, 아무리 큰 것이든 간에 낙심하기 이전에 배우셔야 됩니다. 아, 인간은 하나이구나. 인간은 원래 샬롬으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것이 여러분의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번 수양회를 거치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남은 생애 동안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아, 이것은 다 다른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겪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내가 겪는 이 고난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동료 인간들을 위해서 내가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 처해야 되는 고난’이라고 조금씩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성공한 것입니다.
샬롬은 그런 것입니다.
내일, 모레, 샬롬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샬롬이 깨어진 결과,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이라고 말했고, 이 세상의 정체를 말씀 하셨어요.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샬롬을 복구하는
그 일에 들어가기 앞서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고 고난을 겪을 때, 우리가 가장 힘든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도무지 뭘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것이에요. 그런 질문을 강하게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이번에 말씀들이 더 많이 들어올 것이에요. 그러나 고난은 우리는 고난이 있을 때 고난 자체도 괴롭지만 더 괴로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에요. 그 다음에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여러분 애기 낳는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세다고 그러죠 제가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애기 낳는 고통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애기 낳는 산모들이 그토록 힘들어 하지만 애기 낳고 한 1년쯤 지나면 그러잖아요 ‘자기야 하나 더 낳을까?’
이러잖아요. 그거 왜 그래요. 그 고통이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이에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고난을 받을 때는 하나님으로 버림 받은 거 같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에요.
Why? Why me? 그래서 괴로운 거에요. 그런데 만일, 그 애기가
태어난다는 헤피엔딩처럼 우리도 고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고난을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견뎌 나갈 수 있다면, 그런 것을 두고 우리가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입니다.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 저는 되게 병약한 사람이에요.
60평생 살면서 한번도 건강해 본적이 없어요. 최근에는 지병이 망막에 도져서, 눈을 볼 수가 없어서 여기 참석할 수 있을까가 의문시 됐었어요. 저의 두 아이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심하진 않지만 장애가 있어서 학교를 제때 들어가지 못했어요. 우리 둘째 아이는 저희 도시에 지금
15년째 살면서
high school을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7번을 쫓겨났어요. 저의 엄마 아빠가 상당히 고학력자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이렇게 염려를 했습니다.
‘애가 태어나서 공부를 너무 잘하면 어떡할까’ 난 그런 거 못 봐주거든요. 그래서 ‘얘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주려고 그랬어요. 근데 애를
낳아보니까 전혀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전혀 그런
말 할 필요 없이 충분히 못하기 때문에 고난이에요.
고난 아니, why me?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국은 다 학력을
중요시 하는 사회기 때문에 목사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는 건
굉장히 핸디캡이에요.
참 쪽 팔린
일이라고,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why me? 그러나 제가
그런 고난이 다른 인류가 겪는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겪는 샬롬이 깨어졌기 때문에 겪는 고난임을 알고 예수님이 친히 내려 오셔 그 고난을 자기 손으로 짊어지고 같이 당하심으로써 샬롬을 복구해 주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고난 받음이 불가피 하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고난의 존엄성을 부여했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거나, 기쁨을 잃어 버리거나, 그러지 않아요. 제가 눈을 못보고 있을 때, 어떤 분이 찾아 왔을 때,
‘왜 그리 편안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우거지 상을 짓고 있어야 마땅한데, 평화로워요, 기쁨이 늘 있습니다.
샬롬이. 왜? 그 고난은 샬롬을 이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그 샬롬을 회복시키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 하실 수 있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이 샬롬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비결이 뭔가를 기다리세요.
사모하세요. 여러분이 말씀은 기대해야 됩니다. 기대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밥도 야트막한 접시에는 요거밖에 안되지만
움푹 파인 그릇에는 머슴 밥처럼
많은 양이 들어가듯이,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만드시고 끝날까지 말씀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네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 땅의
실체를 바라봤습니다. 왜 이 땅에는 고난과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지를 왜 그렇게 되는지를 저희들이 살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외 없이 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슴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회복하실 샬롬을
이룸에 있어서 이미 샬롬을 맛보기 시작한 저희들이 마땅히 주님의 발자취를 쫓는 저희들 신자들로써 겪어야 하는 즐겁게 때로는 내가 자처 해서라도
짊어져야 하는 고통임을 깨달았고 존엄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 사랑하는 주님 이 자리에 머리 숙인 주님의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 비밀, 복음의 비밀,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도와 주시옵시고 십자가의 부활로 이루신 샬롬의 놀랍고 충격적인 그 임팩을, 그리고 또한 그 복을 이미 이땅위에서 당겨서 누리고 있는 누릴 수 있는 우리들의 그 복됨 놀랍기 그지 없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아 누릴 수 있는 귀한 기회로 삼아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지구/환경/해양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KOSTA 2009
위기의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없는가?
Task-Major KOSTA
GTM1300: 지구/환경/해양 분야
유상준
개요
새천년의 막이 오른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인류는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등의 문제로 인하여 중대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환경오염문제는 국지적인 영향을 지나서 지구 전체 생태계의 존립을 위협하는 문제가 되었다. 특히 대기오염의 경우를 보면, 1950년대에는 핵전쟁으로 인한 방사능 피해 정도만 전체 지구를 오염시킬 수 있는 물질이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성층권 오존, POPs (Persistent Organic Pollutants), 수은등을 비롯한 많은 오염물질들이 지구의 전지역으로 골고루 이동되어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1).
Figure 1. Evolution of the perceived spatial scale of air pollution problems in the United States. (Keating et al, 2004)
해양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육지에서 유입된폐기물이 바다의 곳곳을 오염시키고 있다 (Figure 2).특히 태평양에 떠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 (Great Pacific Garbage Patch)의 경우 그 규모가 텍사스주의 넓이보다도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물질이 분해되어 정화되기까지는 수백년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계산된다.
이렇듯 인간활동에 의해 지구환경으로 배출된 오염물질은 Environmental Fluids인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이들은 다시 기권 (Atmosphere), 수권 (Hydrosphere), 암권 (Lithosphere), 그리고 생물권 (Biosphere)에 까지 해로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환경오염문제는 지구의 전체 시스템을 오염시키는 Global Problem이 되었다.
Figure 2. Great Pacific Garbage Patch. (oceans.greenpeace.org/en/the-expedition/news/trashing-our-oceans/ocean_pollution_animation)
인류의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은 기후변화와 자원고갈로 이어졌다. 기후변화로 인해 수많은 종이 인류보다 앞서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이를 정지시키지 못한다면 인류 전체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해마다 빙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북극권에 사는 북극곰은 먹이사냥을 위해 조오련이 횡단했던 대한해협보다도 먼거리를 매일 헤엄쳐 다닌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산화탄소등 온실가스의 배출량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며 (Figure 3),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앞장서야 할 선진국과 강대국들은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보고된 바 있다 (Figure 4).이처럼 기후변화문제 역시 환경오염과 더불어 인류의 존립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고 말할 수 있다.
Figure 3. Recent Global Monthly Mean CO2. The
dashed red line with diamond symbols represents the monthly mean
values, centered on the middle of each month. The black line with the
square symbols represents the same, after correction for the average seasonal cycle. (www.esrl.noaa.gov/gmd/ccgg/trends/)
Figure 4. Carbon Tracker shows Atmospheric Concentrations of CO2. (www.esrl.noaa.gov/gmd/ccgg/carbontracker/)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에너지 사용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Figure 5).전세계 인구수 또한 증가하는 추세여서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 추세는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현재의 기술로 미루어 볼 때 석유는 앞으로 약 30년, 석탄은 120여년의 여유분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고, 각국이 앞다투어 청정 및 재생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에너지를 포함한 자원고갈문제 역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Global Problem이라 할 수 있겠다.
Figure 5. World Marketed Energy Consumption, 1980-2030.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이렇듯 지구는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에 의한 자원남용으로 인해 인류를 포함한 모든 생태계가 생존의 위협에 쳐하게 되었다. 결국 지구환경문제가 가장 먼저 세계화를 달성한 분야가 되었다.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각국은 문제해결보다는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과연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토의주제를 다룰 것이다.
(1) 지구환경문제를 야기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2) 지구환경문제에 세상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3) 지구환경문제해결을 위한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근본원인
그렇다면 이런 위기를 초래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환경오염, 기후변화, 그리고 자원고갈 모두 인류의 탐욕과 무절제함이 초래한 결과이고 국제사회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팽배한 무한경쟁에 따른 비협조적인태도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Figure 6).자원을 무분별하고 경쟁적으로 발굴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인류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오염물질이 자연정화능력을 초과하여 배출되었고, 오염물질은 아니지만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조절하는 온실가스의 대기중 농도가 한계농도를 초과함으로 극심한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이는 18~19세기의 철학 및 사상의 조류를 주도한 모더니즘적 세계관에서 발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유토피아의 달성이 가능하다는 논리로서, 진화론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고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등을 통한 인간의 능력만으로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하지만 이 사상은 결국 세계대전과 공산주의와 같은 많은 부작용을 낳았고,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등이 팽배해진가운데인류는 지구환경 전체에 걸친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Figure 6. 지구환경문제의근본원인
해결방안
그렇다면 위기의 지구환경에 대하여 세상이 제시하는해결방안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절제와 협력을 통해 문제의 근본원인인 무절제와 비타협의 문제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이다(Figure 7).실제로 세상 리더쉽은 소비와 생산의 구조적 변화와 기술개발등을 통한 자원남용의 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환경오염물질과 온실가스의 배출 저감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또한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글로벌 협력이필수요소로 제시되고 있다. 이미 국경을 넘은 지구환경문제는 Global Agenda가 되었고, 이는 Global Collaboration을 통한 Global Solution에 의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으로만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모더니즘 시대의 결과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환경문제와 같은 위기가 초래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은,이제 국가와 같은 기존의 질서와 지성 혹은 윤리와 같은절대적사회기준을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게 되었다. 이는 모든 기존의 질서와 기준을부정하고 해체하여그로 인해 다양화된 것들을 새롭게 혼합하여 새로운 글로벌질서를 세우려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으로 볼 수 있다.이는 현재 정치, 경제, 문화등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 또는 몇몇 국가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구환경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새로운 글로벌 리더쉽에 의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리더쉽은 지식/정보화 사회에 걸맞는 과학기술을 보유한 형태가 될 것으로 예측된다. 결국,남보다 앞선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개인 또는 집단이 글로벌 리더쉽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이 리더쉽은 모더니즘의 시대보다 좀더 글로벌화되고 강화된 권력인 동시에 지성과 윤리보다는 감성적이고 쾌락적인 면을 띄게 될 가능성이 높다.
Figure 7. 지구환경문제에대해세상이 제시하는해결방안
그렇다면 이들이 세상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지구환경문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모든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건져내기 보다는 글로벌 리더쉽을 중심으로한 협력 세력들만이 혜택을 누리게 되고 나머지는 소외되며 오히려 핍박받는 구조로 재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왜냐하면 위와 같은 글로벌 리더쉽은 감성적으로 친화력은 높이겠지만,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리더쉽이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Figure 8과 같이 이런 리더쉽의 형태와 시대의 조류를 성경의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우선 창세기의 바벨탑 시대를 살펴보자. 하나의 언어를 가진 인류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 건설이라는 구심점 아래에 모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열방으로 흩으셨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침묵의 시대를 보면, 모든 길을 연결한 로마의 토대위에 하나님없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그리스 철학을 중심으로 세계가 통일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로마가 닦고 연결한 이 길을 따라 사도 바울을 통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오늘날, 인류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인터넷, 휴대폰등의 네트웤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여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적 사고가 세상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고 있다. 결국 시대에 따라 얼굴을 바꾸어 세상을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이끄는 글로벌 리더는 사탄인 것이다. 어떤 개인, 집단, 혹은 국가가 글로벌 리더쉽으로 나서더라도 결국 그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사탄이다. 이런 사회에서 절제와 협력을 통한 인류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절제와 협력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세상의 바벨탑모델로는 인류를 위기의 지구환경에서 구할 길이 없다.
Figure 8. 지구환경문제해결의세상적모델: 바벨탑모델
성경적 대안
그렇다면 지구환경문제를 해결할 성경적 대안은 있는가? 여기에서는 노아의 모델을 통해 살펴보았다. 노아의 시대는대홍수라는 지구환경의 격변으로 인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인류가 공멸할 위기에 놓이게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류와 생태계는 이미 멸망하여 없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인류와 생태계 또한 멸망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노아의 방주와 같은 대안을 제시하여 인류를 멸망에서 건질 노아와 같은 글로벌 리더쉽만 있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럼 노아의 리더쉽 모델을 잠시 살펴보자. 노아의 모델을 전문성 (Specialty), 영성 (Spirituality), 그리고 글로벌 리더쉽의 세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첫째, 노아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Figure 9).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주셨다.그래서 그는 혼자서 거대한 방주를 만들 수 있었고, 방수재로 역청을 사용하였으며, 생물종의 씨(Seed) 역할을 할 수 있는 짐승을 분류할 수 있는 생물학적 전문성이 있었다.성경적 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각각 육식과 채식을 하는 새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지표면의 상황을 모니터링하였다.
Figure 9.성경적 대안: Specialty
둘째, 그에게는 영성(Spirituality)이 있었다. 그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 (창6:8) 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미리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비로소 홍수는 시작되었으며 (창7:1), 그가 제사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다 (창8:20-22). 영성이 있는 사람은 문제의 본질 혹은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그리고 영성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셋째,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었다. 비록 여덟명이었지만 모든 인류와 모든 생태계를 구하였던 그는 글로벌 리더쉽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하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했다 (히11:7). ‘Global Leader’라는 단어는’Global’ + ‘Lead’ +‘er’로 분해할 수 있으며, 이는 ‘전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즉 글로벌 리더는 전체 (Big Picture)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올바른 방향 (Vision)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영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리더쉽이다. 코스타 강사이신 앤아버대학촌교회의 박상춘 목사님께서 리더쉽 훈련중 하셨던 말씀을 잠시 인용해 보면, “사탄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하여 눈이 밝아지게 했다. 바로 세상을 보는 눈, 세계관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눈을 다시 타락 이전의 눈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가치관과 성경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이와 같이 전체를 보고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은,눈이 없는 사람곧 영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글로벌 리더쉽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글로벌 리더쉽을 생각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명성 또는 직위에 의한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작은 요소라는 것이다. 노아는 홍수가 시작될 때까지 최소한 무시당하는 존재였다는 사실 (마24:38-39)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글로벌 리더쉽은 세상적인 명성 또는 신분을통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는 Global Heart, 즉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는 자를 의미한다. 진정한 글로벌 리더쉽은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성과 세상을 구하려는 열정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주님의 머리 (Specialty), 주님의 눈 (Spirituality), 그리고 주님의 심장(Global Leadership)을주시고 노아처럼 사용하신다고 확신한다.
Figure 10. 세상모델과성경모델의비교
도전
지구환경문제에 직면한 위기의 인류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비용편익분석 (Cost-Benefit Analysis)을 해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비용편익은 “Cost from Me, Benefit to Me”이다. 하지만 세상을 품는 글로벌 리더쉽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Follower of Christ)가 가져야 할 비용편익의 새로운 개념은 “Cost from Me, Benefit to the World”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세상을 따라 결국은 침몰할 타이타닉호의 건조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감당못하는 믿음의 용사로 서서 또한번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것인지 말이다.
참고문헌
Bible
Keating,
West, and Farrell (2004), Prospects for International Management of
Intercontinental Air Pollution Transport, The Handbook of Environmen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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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09), International Energy Outlook 2009, U.S. Department of Energy, Washington, DC.
International Energy Agency (2007), Renewables in Global Energy Supply: An IEA Fact Sheet, OE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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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Nations Environmental Programme (2009), UNEP Year Book 2009, 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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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Shaw, Ignell, and Steven (1988), Quantitative distribution and
characteristics of neustonic plastic in the North Pacific Ocean. Final
Report to US Department of Commerce, National Marine Fisheries Service,
Auke Bay Laboratory. Auke Bay, AK, pp. 247–266.
다음 글은 KOSTA/USA 2009의 tmKOSTA에서 발제되었던 경제학 분야 세미나 리포트입니다.
Capitalism in Christian Perspective (2): Practice
현대의경제학과자본주의가, 하나님의성품을닮아창조된인간의capability과함께unlimited
resources의근원이되시는하나님에게서분리된일그러진인간의실존을동시에담아내고있다는측면에서우리는현경제체제에대한긍정적인가능성을타진해보았다. 그러나, 이러한가능성이원칙적으로역사적으로인정된다는점이, 오늘의삶가운데서이러한가능성을사실로구현해내는것의용이성을조금도보장해주지않는다. 따라서, 우리가짊어진‘신앙과학문/직장의통합’과제는그만큼힘겹고또비현실적으로보이기까지하다.
‘나눔’이라는단어만으로도우리는숨이멎을것같은부담감에사로잡힌다. 그러나예수님의기준은‘나눔’의차원보다훨씬높다. 나눔은그단어자체로, 전체가아니라일부를의미한다. 즉, 일부만을남에게내어놓음을의미하는것이다. 그러나, 과부의두렙돈은그녀의생활비전부였다.부자관원에대한예수님의요구도‘전재산을팔아가난한사람에게나누어주고’였다. 따라서, ‘나눔’은우리가실천하기에너무무거운짐이아니라, 오히려기준을낮추어우리가좀더쉽게하나님의뜻에따라살수있도록숨통을틔어준것이라고이해하는것이오히려진실에더근접하다.
막스베버가 1904년출간한 [프로테스탄티즘윤리와자본주의정신]에의하면, 산업혁명이후급속한경제성장으로이루어진자본주의의발달은프로테스탄티즘윤리, 즉청교도정신에의해가능해졌다고한다. 산업화와함께지주와계급중심의사회구조가자본가와임금노동자중심으로개편되는시기에활동했던루터와칼빈과같은종교개혁자들은, 평신도의직업, 세상에서의노동활동을하나님께부여받은 ‘소명’이라고생각하였다. 루터는 ‘직업노동은이웃사랑의외적표현’이며 ‘노동의무를다하는것은신의뜻’이라고하여, 평신도의모든활동에신적의미를부여하는한편, 소명으로서의‘노동’의결과로주어지는돈, 혹은부의축적에도종교적합리성을부여함으로산업화시대에등장한새로운경제주체들에게종교적정신적토대를제공해주었다. 직업이소명이될때요구되는윤리는 ‘근면’이었고, 그결과이루어주는부의축적은 ‘신의선물’이었으며, 이러한부가신으로부터주어진것이었으므로, 맡은자, 즉 ‘청지기’로서주어진부에대하여가질태도는 ‘절제’였다. 일하지않고얻은부를탐욕과쾌락의도구로일삼던중세영주와귀족계급에대한경고이기도했던것이다. 요한웨슬리는 “Earn all you
can, save all you can, and give all you can”라고하며, 근면한노동과절제를통한부의축적과그부를나눔으로풀어낼것을가르치기도하였다.
이와같이, 자본주의의태동과발전은, 노동과노동의댓가로서의부에신성한가치를부여했던기독교정신과깊은연관을갖고있다. 막스베버의관점에서, ‘자본주의정신’이란 ‘직업’ 즉 ‘체계적이고합리적으로정당한이윤을추구하려는정신적태도’였다. 탐욕과무한한이윤추구와같은비합리적인목적을위해부를축적하거나낭비하지않고철저히합리적인목적을위해사용되는돈이라야바로이 ‘자본주의정신’에해당한다고주장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혹은그외어떤형태의) 경제구조를성경적가치관에따라바로잡는일이학문적제도적접근으로구체화되어야하는것이학문/직장의영역에서우리가감당해야할역할임에는분명하지만, 보다궁극적으로하나님나라의확장, 그리고예수그리스도의샬롬이라는원칙을각사람의마음에바로세우는일이반드시함께이루어져야한다. 다시한번, 하나님나라의확장의중요성과의미를우리의소명으로마음에새기게되는이유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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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저희 가정에도 아이들이 다섯 있지만, 아이들이
많은 가정에 보면 아이들 중에는 좀 똘똘하고 뭐든지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좀 상대적으로
좀 못하고 약하고 부족한 아이도 있잖아요. 그리고
심지어 어떤 가정에는 정말 특별한 장애와 아픔을 가진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가정에서 아이들
중에 정말 똘똘하고 잘하고 정말 가정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아이를 언제나 가정의 무대에 올려놓고 그
아이를 다 바라보게 하면 그게 정말 좋은 가정일까요?
정말 좋은 부모일까요? 정말 좋은 가정,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아픔과 연약한 아이가
중심에 있게 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바라보며
모두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하고
그럴 때 정말 그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고 정말
진정한 샬롬이 있는 가정이 되는거죠. 제가 고등학교
때 늘 아는 이웃집이 하나 있었는데, 담벼락 너머니까.
근데 어느 날 이웃집 담을 넘어보니까 거기 갑자기
제 또래 어떤 여자 아이가 바닥을 기고 있더라구요.
중증 장애인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마주치는 순간
엄마가 이 아이를 막 집 안으로 밀어넣었어요. 그 아이는
사실은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바깥에 나와보지
못한 그 가정의 secret인거죠. 그 아이를 그렇게 그 부모가
그 안에다 둔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데
아이가 바깥에 나가면 그 아이가 혹시 조롱과 모욕
당할까봐, 그리고 자신들도 사람들의 눈총들을 받을까봐,
그것이 싫고 그것을 가정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숨겨두고
키웠던 거죠. 그런데,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레나
마리아나 그리고 우리 한국에도 이지선 자매같은 사람들.
어쩌면 수치로만 생각하고 숨겨야 될 그런 아픔과 약함인데,
오히려 그것을 당당하게 빛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드러냄으로 오히려 정상인들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 우리 송명희 시인의
어떤 이야기도 알잖아요.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나 가진
지식 없지만, 나 가진 것 없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을 갖게 하셨다는 것. 사실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보화와 같은 것을 주셨고 또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성공 스토리들을 무대와 사람들의
중심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번 돌아봐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꾸 중심이 되도록
해야되는 게 아니라, 혹 우리 가운데 더 소외된 사람,
우리 가운데 돌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운데로
오도록 도울 수 있어야 되겠죠. 그 때 우리가 함께 서로를
더 도울 수 있는 샬롬의 관계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공하는 삶하고
열매맺는 삶은 다르죠. 성공하는 삶과 열매맺는 삶의
차이가 뭘까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성공하는
삶은 마치 꽃이 활짝 예쁘게 피어나는 것과 같다면
열매맺는 삶은 정말 열매가 맺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알듯이 열매는 언제 맺히죠?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을
때 맺히나요? 그것이 다 져야지만 맺히는 게 열매잖아요.
그 꽃잎이, 아름답던 꽃잎들이 낡고 시들어 다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그 다음에 생겨나는 게 열매라는 것.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과
야심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땅에 떨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정말 우리가 주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아시죠? 어떤
거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예, 그 아홉 가지 열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 열매 자기 좋으라고 있는 거 하나도 없어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옆사람들이 그 사랑 받는 거 아녜요?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기쁨이 옆사람들을
격려해주는 거고, 평화가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 사람들이 거기서 쉼을 얻는 거죠. 오래 참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인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거고, 자비로운 사람 때문에 그 주변 사람들이 자비를
얻고, 선한 양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선한 손길의 도움을 얻는 것이구요. 근데
열매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우리가 열매는 나무에 아름답게
탐스럽게 달려있거나 그릇에 탐스럽게 담겨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사람들의
음식이 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될려면 이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양 자체가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되고
먹이가 되는 거겠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이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우리가 샬롬이라는 것을 이제 가져다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소중한 가족 관계에서도 그렇게 서로의
음식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가정에서 꽃이
되고 싶기보다는 열매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 그 때 그 가정이 얼마나 샬롬의 가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믿음의
경주가 있죠. 우리도 달려가야 될 믿음의 경주가
있는데요, 우리 믿음의 경주가 경쟁 사회의 경주랑
정말 다른데, 경쟁 사회의 경주는 라이벌과의 경쟁이잖아요.
경주. 옆에 뛰는 사람이 있기에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는
라이벌이 있어서 뛰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부르심이
있기에 그 소명 때문에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는 것이지,
옆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다면 이 땅에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지, 누군가 옆에서 뛰기
때문에 뛰는 거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 앞서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있기에 우리가 그 뒤를 따를
경주가 남은 것이지, 옆에 있는 라이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우리가 competition이 아니라 compassion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늘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북미의 native
indian에서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근데 한 마리의 wolf는 아주
경쟁심, 이기심, 탐욕, 분노, 상처, 그래서 공격하고
먹으려는 그러한 wolf가 한 마리가 있고 다른 한 마리의
wolf는 이제 긍휼, 사랑, 자비, 온유, 나누고 싶어하는
그런 wolf가 있단다. 근데 이 두 마리의 wolf가 우리 속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어요. 한 마리 wolf는 competition의 wolf고
한 마리는compassion의 wolf고. 손주가 물었어요. 할아버지,
어느 쪽 wolf가 이겨요? 뭐라고 답했을까요? 니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의 흐름과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마음을 쏟고 살아간다면 이 competition의 wolf는 점점 더
살이 찔 것입니다. 더 강해지겠죠. 우리 안에 있는compassion의
wolf는 맥을 못출거예요. 우리에게도 그게 있긴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또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이렇게 코스타
집회를 선택하고 오는 것처럼 사실 이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색다른 힘을 주는 거잖아요. 바로 이competition의 wolf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compassion의 wolf에 먹이를
제공하는 선택을 하는 거죠. 이런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얼마나 다른지는 우리가 알잖아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먹이를 줘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치열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깨어서 이 쪽의 wolf가 먹이를
먹기보다는 정말 compassion의 wolf가 계속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의 흐름으로부터는
좀더 자유로와질 수 있고 그리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샬롬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정말power를
사용하는 길이 아니라 power를 다 내려놓는 길이었잖아요?
power of powerlessness라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리도 경쟁 사회 속을 살아가다보니 그리고 이 경쟁
사회에서 결국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킨 사람들이
다 power를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논리가 ‘우리가 힘이 있어야된다.
우리가 주류 사회에 들어가야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있어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우리가 더 전문인이 되어야 된다. 우리가 전문성을
가져야 세상을 우리가 더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논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맞죠?
여러분들도 동의하세요?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자연스러워졌어요.
당연히. 그런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힘이 없으면,
우리가 결국 위에 서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면,
우리가 주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우리는 별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라는 그런
동일한 논리인거죠.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한번 다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셨지만, 그 권세를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으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으로 그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잖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높아지라고
하신 게 아니라 낮아지라고 하셨고, 올라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려가라고 하신 거죠. 대접받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대접하라고 하신 것이구요. 진정 우리가
오히려 power를 가지려고 하기보다 내려놓을 때 진정한
power가 나타난다는 것. 로마서 15장 1절과 2절에 보면
그런 바울의 고백이 있어요. ‘우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다 내게 미쳤다 함과
같으니라’. 그 표현을 가만히 보면은요. 우리 강한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 연약한 자들의 약점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리고 비방과 모욕은 내가 받고 그런 것인데요.
우리가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 세상에서 소위 물질과 안정된
지위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어서 강해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가? 우선 강한 사람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줘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수고를
대신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둘째, 자기들의 인생의
어떤 재미와 편안함을 정말 끊임없이 추구해가요. 그리고
또 하나 어려운 위기의 시기를 잘 넘어갈 수 있는 안전
장치들을 다 갖고 있어요. 보험도 들어놨지만 때로는
심지어 대신 감옥에 갈 사람도 갖고 있어요. 그 정도로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에
올려놓고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위기에서 안전한
거죠.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우리가
함께 아주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행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죠. 함께 먼 산 길을 같이 걸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생기냐 하면, 도저히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죠. 더 이상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거죠. 그래서 자기 짐이 더 무거워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 때, 자기를 기쁘게 한 게 아니라 그 약해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제 다리가
풀려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앞서서 가서
위험 요소들을 다 제거합니다. 먼저 위급한 상황들을
다 처리해주는 거죠. 잘 걸을 수 있도록. 그러고보면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고
오히려 위급한 상황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러고보면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약한 사람들인거죠.
정말로 강함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짐이 내 어깨에
올라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위험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 놓으셨고 단 한번도 자신을
기쁘게 하신 게 아니라 다른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사셨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모욕과 비방,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으셨으니깐요. 그래서, 이 땅에 샬롬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powerlessness죠.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가장 힘없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고,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바로 이 땅에 샬롬을 가져오는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올라서는 길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정말 내려갈 수 있을 때, 진정
샬롬이 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질 때가 아니라, 우리가
내려놓을 때, 우리가 오히려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그때 진정 샬롬이 찾아온다는 것을 좀 생각해봅니다.
Power에 대한, 둘째날에
유진소 목사님이 잠깐 언급한 말에도 나와있지만, power에
대한 헬라어 두 가지가 있는데, 두나미스와 엑소시아라는
두 단어에요. 두나미스는 거기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온
것이고, 엑소시아는 엑소시스트 이제 그런 것처럼 사실은
다른 의미가 나오는 것인데요. 똑같은 power인데, 하나의
power는 힘, 강력, 타율적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복종케 하는, 그런 보이는 어떤 power같은 것이라면,
엑소시아는 보다 원리, 가치, 그런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죠. 근데, 하나님은
두 가지 power를 다 가지신 분이죠. 예수 그리스도도
두 가지 power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나미스를 사용하실 때가 있어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power를 사용하실 때가 있는데, 그땐 어떤 때만
사용하시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바로의 철권 통치에
대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그리고, 때로는 마귀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묶여있는
사람을 해방하실 때, 그 마귀의 권세를 쫓아내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고 이 땅을 변화시킬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을 이제 불러서 제자가 되라고 하실 때, 절대로
두나미스를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 예수님은 엑소시아를
통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신 것이죠. 결코 타율적으로
따라오지 않도록. 자발적으로만 오게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과 의욕이 있다면, 우리도 어떤 보이는 power를 가지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말 섬김이 오히려 더
power라는 것. 내려갈 수 있는 것이 더 power고 포기하는
것이 더 power라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을
더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이제 초청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한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제 그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순례자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이 순례자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한번
표를 통해서 잠깐 잘 정리해보고 싶은데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면
하나는 잘 정착해서 살아가는 정착민들, 그리고 온갖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관광객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례자들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걸맞는 단어는 어떤 걸까요? 정착민입니까, 관광객입니까,
순례자입니까? 우리 순례자라고 고백하죠. 히브리서
11장에도 있는 표현처럼 그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표현이 그거잖아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되,
땅에서는 그 약속을 따라 받지 못하였지만, 스스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구요. 그들이
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본향을 사모했다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는데, 이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듯이, 우리는
순례자라는 찬양도 부르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이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떠남이 있는거죠. 그리고, 여행은 뭔가 목표가 있기에
추구하면서 여행합니다. 그리고, 여행의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되는 게 있죠. 그리고, 여행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근데,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정착민과
관광객과 순례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완성해보고
싶은데요. 정착민은 떠나는 사람들인가요? 전혀 아니죠.
떠남이 없죠. 그리고, 떠남, 버림, 그리고 내려놓음이
사실은 없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착민이죠.
관광객은 떠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떠나죠. 그러나
관광객들은 얼마만큼이나 떠나는 걸까요? 관광객들은
자기 문화를 다 내려놓고 떠나나요? 사실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아무리 관광 여행이 좋아도 나 고추장, 김치
없으면 안돼 하면서 챙겨가잖아요. 관광 여행에서는
떠나긴 떠나지만 사실은 부분적으로면 떠나는 거죠.
적당히 떠납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떠남은 어떤 걸까요?
순례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거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음의 여행을 할 때도 사실은 모든 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그런 떠남의 부름이 있었던 것.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받았을 때, 그들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다 버려두고 떠나게 됬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의 부름, 순례자로의 부름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안전 장치들조차도
실은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구함, 정착민은 뭘 추구할까요?
정착민들이 추구하는 것은 우선은 안정이구요. 그리고,
또 하나 붙인다면 번영, 형통을 추구하는,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죠 당연히. 그럼 관광객들을 뭘 추구할까요?
관광객들을 즐거움, 만족을 추구한다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세 가지 만족, 요한일서에 있는 표현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실제로 우리 관광
상품들을 보면 알 수가 있잖아요. 관광 상품에서 중요하거든요.
사실 몸이 즐거워야죠. 먹거리, 잠자리가 나쁘면 사실
관광객 모으기 어렵잖아요. 그리고, 몸만 즐거우면
뭐합니까? 볼 거리가 정말 중요하죠. 볼 거 없으면 왜
가겠어요? 다 눈요기 때문에 가는건데. 또 하나 이생의
자랑두요. 우리 관광 여행가면 제일 많이 하게 되는게
뭐냐하면 사진을 찍어오는 것인데요. 그 사진 많이
찍어서 이제 가져오죠. 근데 그 사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누구예요? 나. 관광지의 유적,
사람, 문화, 그것은 다 나를 위한 들러리고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게 중요하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관광객은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순례자는
뭘 추구하는 사람일까요? 그 Kingdom seeker 잖아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죠. 정착민은 뭘 받아들일까요?
다르게 얘기하면, 정착민들이 잘 못 받아들이는게 뭐죠?
외부인, 또 변화. 정착민들은 변화 싫어하잖아요. 또
바깥에서 오는 거 싫어하고. 그 얘기가 뭐냐하면,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는 거죠. 익숙한 것만. 관광객은 뭘 받아들일까요?
새로운 거 받아들여요, 받아들이지 않아요? 받아들이죠.
그런데, 단서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것만. 새로운 거라고,
아무리 새로운 음식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왜 받아들이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죠. 순례자는 어떨까요?
순례자는 이 믿음의 여정, 순례 여정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받아들이는 거죠. 싸움이 있는데, 정착민은 주로 누구랑
싸울까요? 정착민의 싸움은 그 주변 정착민과의 싸움인데요.
왜냐하면, 그 마치 나라와 민족도, 국경이 붙은 나라와
민족치고 사이좋은 나라가 없어요. 이유는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고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니 경계선
분쟁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사람도 살지 않는
독도까지 가지고도 사실은 으르렁거릴 수 있는 게 관계잖아요.
근데, 그런 거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정착민으로
살아갈 때는 언제나 주변 정착민들과 어떤 영토 분쟁처럼
경계선 자리싸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죠. 그러니까
주변 정착민과 싸웁니다. 그럼 관광객은 누구랑 싸울까요?
관광객은 주로 가이드랑 싸웁니다. 왜냐하면, 관광
여행을 나선 이유는 좋은 관광 상품을 소개받았기 때문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가이드에게 있는 거죠. 불만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나서서 모세를 뒤따라갈 때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좋은 관광 상품으로 소개된
거죠. 그러나, 아무리 가도 가도 먹을 것, 마실 것, 잠자리,
불편한 것 밖에 없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나타나지도
않고. 누구 책임입니까? 모세 책임이죠.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출애굽기 19장에서 들은 것처럼 ‘이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리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제 그런 비전을
주신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진 거는
그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그래서,
그 백성이 광야길을 관광객의 마음으로 걸었으니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랬던 거죠. 순례자는 누구랑 싸울까요?
순례자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죠. 우리 교회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착의 교회, 정착의 교회는 사실은
어두움을 갖기 쉬운 거죠. 때로 어떤 교회들은 전통과
옛날 것을 절대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원래 마음들이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보면.
우리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 아마 그 사람들도 젊었을 때 처음 거기에
입문할 때는 굉장히 순수했을 거예요. 다른 유대인
어떤 사람보다 더 말씀을 사모하고 또 주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리로
들어갔겠죠. 하지만, 거기에 오래 정착하다보니 완전히
정착민이 되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결국은
이제 정말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도 정착의 교회가 될 때, 그 세상
안에서 잘 정착하려고 할 때, 이러한 어둠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 교회가 생각보다 정착의 교회는 언제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쉽고, 그리고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려하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참 갈등과 다툼을
많이 겪게 되고, 교회와 교회들 사이도 경쟁 관계가
되기 쉬운거죠. 그런가하면 관광객의 교회, 어쩌면
오늘은 좀 그런 모습도 많이 보여지는 것 같애요. 오늘
우리 시대가 customers’ satisfaction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소비자 만족 시대. 정말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잖아요. 정말 많은 교회들도
성장하고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많은 성도들도 소비자처럼
모든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를 선호하게 되었어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가 좋죠. 마치 우리가 mall에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mall이 쇼핑하기 좋은 것처럼, 사실 오늘의
교회는 정말customers’ satisfaction과 많이 이제 가까와져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우리는 정말 순례자의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겠죠. 여러분들은
누군가요? 정착민인가요, 관광객인가요, 순례자인가요?
아마 섞여있다고 고백하게 될 거예요. 내 안에는 정착민의
모습도 보이고, 관광객의 모습도 보이고 순례자의 모습도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우리를 또 너무나
더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께는 정착민의 모습이 전혀
없었고, 관광객의 모습도 전혀 없었잖아요. 오직 순례자의
모습만 있었죠.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는 이유가 있겠죠. 예수님은 우리가 정착하는 거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족을 누리는 거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개인보다 주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모두를 위한 것이죠. 저도 저희 아이들이
다섯이지만, 아이들이 이제 처음에는 같이 먹을 것을
분배해 주잖아요. 어렸을 때. 그럼 각자 자기 것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다가 어떤 애는 빨리 자기 것을 먹어치워버리고,
어떤 애는 잘 보관해둬요. 그러면 이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관해둔 애가 그것을 먹으려 그럴 때, 먹었던
애가 나 좀 달라 그러죠. 그러면 안 줄 권리가 있죠.
당연히. 안 줘야 더 공평하죠. 그런데, 그 때 그 아이가
안 주고 절대로 안 준다고 지키고 있을 때 부모가 볼
때는 ‘아이, 그래도 그거 좀 주지’ 그런 마음 드는게
사실이예요. 그렇잖아요? 설사 잘 보관해놓고 지킨
아이가 자기 것을 먹는 게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 언제나 sharing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진정한 샬롬, 조화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서로 아끼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려고 할 때,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이 세상에는
크리스챤들 중에서 참 이 샬롬을
위해서 특별히 헌신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저는 제가 몇 가지를 예로 들고 이제 마치고 싶은데,
혹시 여러분, 떼제 공동체라고 들어보셨어요? 떼제라는
크리스챤 공동체가 있는데, 한국에도 이제는 떼제 음악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근데 이 떼제 공동체는 프랑스의
떼제라는 아주 시골 벽지에 있는 곳인데요, 거기는
이차 대전 끝날 즈음에 어느 한 청년이 혼자서 중보
기도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하게 되면서
생겨났어요. 그런데, 거기를 지나가던 어떤 다른 청년도
같이 중보 기도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 거기에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게 됬는데, 지금은 매년 유럽의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근데
그 공동체가 헌신하는 거는 뭐냐하면 화해와 일치예요.
화해와 일치, 정말 샬롬이 이땅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개신교 청년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남자 형제들인데, 그런데 이 떼제 공동체에서는
언제나 하루에 세 번 예배가 드려지는데, 그리고 그
예배는 다 라틴어로 이루어져요. 프랑스 마을에 있는데도.
라틴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유럽은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후에 계속해서 기독교 세계였잖아요. 그렇지만, 나중에는
개신교와 캐톨릭 사이에, 또 프랑스와 독일, 프랑스와
영국, 이태리, 모든 나라들 사이의 전쟁의 역사예요.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인 전쟁이죠. 그 전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 싫어합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 싫어하고 그러듯이 유럽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긴장과 그 갈등이 많아요.
근데 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함께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회복하고 하나될 수 있도록 그래서 중보 기도하는
곳이고 또 모든 언어,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의
모체가 라틴어잖아요. 그래서, 라틴어로 선택해서 찬양을
부르는 거죠. 거기가 정말 샬롬을 위해서 참 아름다운
헌신을 한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고. 그리고
또Christian Peacemaker 팀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우리 한국에는 또 다른 단체지만, 혹시 여러분들
프론티어즈라고, 개척자들이라고 들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 단첸데요. 이Christian Peacemaker들이나
개척자들은 어떤 사역만 하냐면 세계 분쟁과 전쟁이
있는 지역으로만 사람을 보냅니다. 거기에 그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서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 이제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 헌신하는 거죠. 상처입는 쪽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기의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하고 가능하면
그것이 다시 복수와 분노로, 복수로 나가지 않도록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샬롬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그 샬롬이 나로부터
나의 가까운 가정과 이웃, 또 교회, 또 직장, 또 학교,
또 심지어 나의 민족을 넘어서서 다 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샬롬에 대한 정말 진지한 이해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멀리까지 갈 이유는 없다 하더라도 정말 샬롬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고 또 우선 내가 가정 안에서도
샬롬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또 이 땅에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합니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시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고
무엇보다 한편 평화, 샬롬을 누리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샬롬을 누리신 분인데
그러나 한편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슬퍼하셨던
분인 것 같기도 해요. 슬픔과 평화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예수님은 왜 슬퍼하셨나?
예수님의 슬픔을 성경에서 좀 본다면 특히 누가복음
19장 42절에 보면 예루살렘성을 보며 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네가 평화에 이르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것이 너의 눈에는 가리워져 있구나.’ 평화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 땅의 사람들을 보면서
슬퍼하신 거죠. 예수님은 하늘의 평화가 뭔지 아시고
누리시는 분이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슬퍼하셨다는 것.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샬롬을 위해 헌신하신 분인데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은
함께 이 땅에 샬롬, 평화를 위해 헌신할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고 그래서 찾아오셨고 부르시기도 한 거죠, 제자들을.
근데, 제자들이 얼마만큼이나 이 샬롬을 위해서 잘
준비되었었는지 우리가 성경을 보더라도 제자들은
참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이었음을 우린 성경에 있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많이 보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대동해서 한 번 청원을
한 적이 있죠. ‘주님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 우리
두 아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혀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냐하면
‘너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구하는지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어요. 그때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은 ‘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죠. 근데 그 잔은 원래
어떤 잔이죠? 고난, 죽음의 잔인데, 그 의미도 모르고
‘마실 수 있습니다’ 했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 너희도 언젠가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나에게 구한 것,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예비되었든지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고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부탁하는 것이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나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그렇게
세도를 부리고 위에 서려고 하지만 너희 중에는 정말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되겠고 대접을 받으려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러 왔다’ 그렇게
말씀하셨죠. 근데 그 에피스드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어머니까지 모시고 와서
청원했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어땠어요?
다 제자들이 분이 났다고 했어요. 그러고보면 그 제자들이
함께 동역자고 친구들이고 정말 가족이 되었었는데,
그 제자들 중에 헛된 야망과 꿈을 가진 제자들의 이야기가
결국 관계들을 갈라놓게 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샬롬을 이루고 샬롬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꿈을, 어떤 야망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먼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샬롬이
무엇이냐 라는 샬롬의 의미에 대해서
세미나를 할 때 샬롬은 다름아닌
조화이고 관계의 회복이고 그리고 sharing이라고
표현했었는데요.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를 한번 이제
어떻게 다른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사람이라면,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인데요. 여러분들은
Empire builder 입니까, Kingdom seeker 입니까? 어떻게 다를지
좀 생각해보고 싶어요.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왕국을
세우려는 사람인데, 자기 왕국을 세우는 사람은 스스로
통치하죠. 왜냐하면 나의 왕국이니까 내가 다스립니다.
하지만, Kingdom seeker는, 즉 하나님의 통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또한 신뢰합니다.
그분이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는거죠. 스스로 통치하는
사람은 자기가 통치하지만, 언제나 마음에 불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다스려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한 거죠. 통치할 수 있지만, 통치 안 되는
영역이 있으니까.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의 통치를
신뢰하기에,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Empire
builder는 자기의 영토가 분명해야할 필요가 있어서 울타리를
세우고 자기 편을 만듭니다. 왜냐하면 내 통치의 영역이
안정되고 확정될 필요가 있으니까, 분명할 필요가 있어서이지요.
그러나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울타리도 걷고
그리고 자기 편 만들지 않죠. 자연히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참 다른데요. Empire builder는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가 다스리니까. 그리고 사람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나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죠. 왜냐하면
내 통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싫으니까요. 하지만,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을 따라서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섬기려 하고 또 이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세우려 하고 사람들을 묶어두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풀어줍니다. 자연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차이가 나타나는데Empire builder로 살아갈 때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이 많이 생기죠. 왜냐하면 내가Empire
builder일 때 지금은 내 밑에 있고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지만 이 사람도Empire builder로 보이기에 언제 나를
치받고 올라올지 모른다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긴장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그러나, Kingdom seeker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관계 속에서도 긴장이 아니라
평화와 신뢰가 있습니다. Empire builder로 살아간다면
친구와 이웃은 늘어날까요, 줄어들까요?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경쟁자와 적은 늘어나게 되겠죠.
그러나, Kingdom seeker로 이렇게 살아간다면 오히려 친구와
이웃들이 늘어나게 되고 경쟁자와 적은 사라져가게
되는 거죠. Empire builder와 Kingdom seeker와 이렇게 다른데요,
야고보와 요한이 그렇게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할 때,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을 위해서
헌신했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
같았지만 스스로, 사실 그들 안에는Empire builder의 야심을
그대로 갖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요? 목회자들이나 오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도Empire builder가 될 수
있을까요? 예, 좀 안타깝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대단한 헌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더라도, 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생각한다 하더라도 만약 나의
삶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이런 부분들이
있다면 내 마음이 뭔가 불안하고 내가 스스로 다 control해야
마음에 좀 안심이 생기고 그리고 자꾸 나의 분명한
울타리를 만들고 내 사람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자꾸 지배하려고 하고 그리고
이용하려고 하고 묶어두려고 하는 것이라면, 함께 있는
동역자의 관계 속에 자꾸 긴장과 불신이 생겨난다면,
자꾸 소중한 관계들이 경쟁자와 적이 되어간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단해보이는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Empire builder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 사실 기독교도, 교회도 Empire 일 수
있다는 것을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보게 됩니다. 만약
기독교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떤 다스리려고 할
때,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고, 그리고, 울타리를
세우고 배타적으로 자기의 세력들을 결속시키려고
할 때, 기독교가 다른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배하고 이용하고 또 묶어두려고 할 때, 그리고 바깥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긴장과 불신들을 만들어낼 때,
사실은 기독교 세계도 Empire가 되고 마는거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때 그 당시의 기독교는 사실은
Empire였지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주변 민족들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그래서 어두운 역사를 남겨놓게 되었던 거죠. 사실
이 Empire builder냐, Kingdom seeker 냐는 우리의 작은 관계
속에서도 늘 이제 왔다갔다 하기가 참 쉬운 거잖아요?
우리 부부 관계에서도 사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만났지만,
서로 영역 다툼하기가 참 쉽고 사실은 지고 싶지 않은
것이고, 내가 주도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나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할 때, 우리는Kingdom seeker가 되기보다는Empire
builder가 되서 결국은 샬롬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렇게 좀 생각해봤는데요. 오늘
우리 한국 기독교가 굉장히 많이 공격과 모욕을 당하고
있잖아요. 개독교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데, 근데 도대체
이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좀 생각해보면 저는 이렇게도
표현하고 싶어요. 안타깝게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요. 어떤
의미냐 하면 저도 기독교 가정에서 이제 몇 대째 자랐는데요.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그리고 교회에서
때로는 목사님이 오셔서 심방을 해서 축복해주시고
기도해주시잖아요? 또 교회 장로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부모님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잖아요. 제일 많이 들었던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면 ‘하나님, 이 아이가, 우리 다음 세대가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게 해주시고, 꾸는 자가
되지 않고 꾸워주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 들어보셨어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래도 들어주신
거 같애요.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대통령도 되고 사실
우리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어느 영역을 가든지
위로 가면 갈수록 크리스챤 비율이 높잖아요. 크리스챤들이
리더가 된 영역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들
안에 정말 섬기려는 마음,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려는
마음, 으뜸이 되기보다는 종이 되려는 마음이 너무나
배우지 못했고 없었기에 단지 위에만 섰을 뿐 결국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 같아서 결국은 바깥으로부터 멸시와 모욕을 받게
된 것 아닐까요? 만약 우리의 윗 세대의 신앙의 부모들이
이렇게 기도했더라면 어떨까요? ‘하나님, 우리 아이가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어도 좋으니 정말 섬길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아이가 아니라 정말 대접할 줄
아는 아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정말 이 땅에서 우뚝 서는 아이들이 아니라 정말 바닥에서
섬길 줄 아는 아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 기도들이
드려졌다면 오늘 한국 기독교는 정말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전히 오늘도 야고보의 어머니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처럼 동일한 기도들이 계속
올려지고 있는 것 같애요.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너희가 정말 무엇을 구해야 하는 줄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하겠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대접하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정말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 길을 잘 보여주셨잖아요.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단 한번도 땅에 있는 어떤 영광을 얻으려고
하신 적이 없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오직 Kingdom
seeker로만 사셨는데, 그 Kingdom seeker로 살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고 기다려주신 거죠. 그런데, 우리가 알 듯이 제자들도
나중에 변했잖아요. 그렇게 엉뚱한 야망을 가졌던 제자들도
나중에는 다 달라졌습니다. Kingdom seeker가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우리도 부르고 계시는데, 우리를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되기를, 우리의
나라, 나의 empire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하실 때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하시죠.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너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있지 않냐고. 하늘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계신다’라고요. 그러니, 너희는 그런 것들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셨죠.
그러면서 그때 예로 드신 것이 너희가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다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고 입히시지 않냐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정말 한번 그렇게 생각해보죠. 공중에 나는
새가 하나님께서 먹이시나요, 스스로 먹이를 찾아서
사나요? 그리고, 들에 핀 백합화. 스스로 그렇게 이제
피어나는 건가, 하나님께서 다 입혀줘서 그렇게 아름답게
된 건가요? 우선 새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새가 열심히 먹이도 찾아서 먹고 살아가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먹이시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심지어
early bird라는 말도 있잖아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 그러니까, 경쟁, 땀흘리고 노력해야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보다 근면해질 것을 말하기
위해서 생겨난 속담이죠. 그런데, 실제로 새들 중에
더 먹이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알듯이 새들은 우리가 갖지 않은 눈과 날개를
갖고 있는데,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먹이를 참
잘도 찾아요. 그리고,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잘 가는
거죠. 근데, 그것이 노력일까, 선물일까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갓난아기들이 태어나서 엄마 젖을 쪽쪽 빠는
것은 노력일까요, 본능인가요? 빨라고 해서 빠나요,
저절로 빨게 되나요? 저절로 빨게 되는 것이죠. 그거는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거는 노력도 아니고 땀도
아니라구요. 저절로 하게 된 것.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니까,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거고
기르신다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까, 너무 스트레스받고
살지 말라는 면에서 어떤 사람이 재밌는 도전을 했어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는 말에 대해서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먼저 잡아먹힌다’. 똑같은
논리겠죠. 만약에 정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 거라면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 먼저 잡아먹히니까.
자연의 세계는 스스로 땀흘리고 노력하고 노력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늘이 주신 그 선물, 은사, 본능을
따라서 그 축복을 누리는 것 같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그 자그만한 씨앗에서 실같은 뿌리가 내려오는데, 참
멀리도 잘가요. 물도 잘 찾아가잖아요. 그것을 어떤
눈으로 보면 노력인 것 같지만, 그러지 않는 씨앗들이
있는게 아니잖아요. 안에 생명만 충분히 있으면 다
찾아가요. 그냥 그러면서 하늘이 주신 선물을 따라
꽃을 피워내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백합화를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입은 그 모든 영화도 이 들꽃 하나만 못하였다’ 하셨죠.
솔로몬의 영화와 들꽃의 영화. 어떤 게 더 영광스럽습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솔로몬의 영광처럼 대단해보이는
게 없는 거 같은데, 왜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이 들꽃의 영광이 더 크다고 하셨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곰곰히 묵상하면서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된 기회가 있었는데요,
가만히 보면 이 솔로몬과 들꽃을 비교해본다면, 솔로몬의
영광은 소유로 인한 영광이라면 들꽃의 영광은 존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이 그렇게 우리에게 영광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솔로몬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아니라 그에게 덧입혀진 것들이예요. 그가 가진 지혜와
지식, 그가 갖게 된 인기와 명예, 그가 가진 물질과
권력, 그것이 솔로몬을 영광스럽다 보는 거죠. 만약
솔로몬에게 그런 모든 게 없다면, 지혜와 지식도 없고,
인기도 없고, 권력도 부도 없다면 누가 솔로몬 영광스럽다고
말하겠어요? 우리가 말하는 솔로몬의 영광은 그가 가진
소유에 대한 영광이죠. 그러나, 들꽃은 덧입혀진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창조주가 자신에게 준 몸뚱아리 그
자체로 창조주의 아름다우신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거죠. 또 하나 차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랐습니다. 솔로몬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멀리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까지 구경하러
올 정도로 부러움도 사기도 했죠. 그런데 솔로몬은
잘 몰랐던 거 같애요. 솔로몬이 죽고 난 뒤에 아들 르호보암이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찾아와서 간청을
하죠. ‘임금님, 선왕 솔로몬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 우리의 어깨에 얹어준 멍에와 짐이 너무나 무거워
이젠 더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짐을 좀 내려놓게
해주십시오.’ 솔로몬이 통치할 때 7년 동안의 성전
건축과 이어서 13년의 왕궁 건축을 하면서 백성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켰던 거죠. 근데, 그때 그 말을 들었던
르호보암은 왕궁에 있는 신하들 중에 젊은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서 강경책으로 나갔었죠.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가니까 백성의 마음들이 떠나고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열 지파가 떼어서 나가면서 이스라엘이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르호보암의 정치력의 부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원인 제공은 누가 한 겁니까?
솔로몬이 한 거예요. 솔로몬이 왕궁에서 편한 잠을
잘 때, 백성들은 허리가 아파서 신음하고 있었고, 솔로몬이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만족하고 있을 때 백성들은
눈물 뿌리며 고통하고 있었다는 것. 솔로몬의 영광은
백성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담보로 얻은 영광이었죠.
하지만, 들꽃은 어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잖아요?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뿐, 누구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또 남기고 가는게 달랐어요.
솔로몬은 뭘 남기고 갔나요? 한편 솔로몬은 안정된
국가와 모든 부와 권력을 아들에게 다 고스란히 물려줬어요.
보통 솔로몬을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솔로몬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예요.
아버지 다윗은 역경도 많이 겪고 고난 많았잖아요.
사울 왕의 시기 때문에도 참 고생고생했지만, 왕위에
오른 다음에도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또 피난 생활했어야
됬고, 정말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는데,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이 안정된 국가를 물려줬거든요. 그래서 요람에서부터
정말 형통하게 시작했어요. 그리고, 왕위에 있는 동안에
외적의 침략을 받아본 적도 없고 안에서 내란이 있지도
않았어요. 죽을 때 아들에게 다 물려주고 갔어요. 그러니,
복지 사회의 구호라고 말할 수 있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형통했던 사람이 사실 솔로몬이죠. 근데, 솔로몬은
다 잘 물려준 것 같았는데, 사실 솔로몬이 뿌려놓고
간 어둠의 씨앗들이 있었어요. 그 하나는 앞서도 얘기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날 어둠의 씨앗을 남겨놓고
간 것이고, 또 하나 솔로몬이 왕위에 있을 때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품에 안게 되면서 우상 숭배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왕들은 거의
예외없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 거죠. 솔로몬은 어둠의
씨앗들을 가득 남겨놓고 갔습니다. 그게 솔로몬의 영광이예요.
하지만, 들꽃은 뭘 남겨놓고 갈까요? 자기 생명의 씨앗들을
남겨놓고 가겠죠. 그 씨앗들은 또 들꽃들이 되어서
창조주의 정원을 아름답게 할 것이구요. 솔로몬과 들꽃,
뭐가 더 영광스럽습니까? 네, 그러면 솔로몬 되고 싶으세요,
들꽃 되고 싶으세요? 주님은 솔로몬의 영광을 꿈꾸고
살아가고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우리, 그래서 보다
더 필요를 더 채우고 갖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엇을
더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는 거죠. 너희가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결국 너희의 모든 관계들은 전쟁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더 위에 서려고, 더 가지려고
아귀 다툼을 하다보면 모든 관계들은 깨지고 만다는
것. 너희에게는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느냐고. 그 아빠 아버지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다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고. 그러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신거죠.
우리는 샬롬을
위해서 정말 기도할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도.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이 올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애요. 최근에 한국에도 소개된 다음에 몇
해 전 부터 꽤 인기가 있었던 기도가 있죠. 야베스의
기도. 근데 이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거였죠? 내게 복에
복을 더하셔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 또 환란이 없어서
근심도 없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잖아요. 근데 그 기도가
아주 인기가 있게 되서 마치 심지어 부적처럼 어떤
사람들은 차에도 붙이고 집에도 붙여놓고, 또 많은
크리스챤 집회의 어떤 제목으로도 많이 등장하게 되었어요.
근데 저는 이 기도에 대해서 좀 아쉬운 마음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그
주기도문과 한번 이렇게 비교해보고 싶어요. 야베스는
복에 복을 더해달라 기도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시잖아요. 야베스는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의 뜻이 이뤄지기를 기도하고 있구요. 야베스는 어떤
환란도 근심도 없기를 기도하지만, 예수님은 유혹과
싸우고 악을 이기는 그런 거룩한 근심을 담은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것. 남미의 우루과이에 있는 어느 한
성당에 붙어있다는 주기도문에 대한 글을 제가 접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도전이 됐었어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거 같은데, 제가 한번
읽어드릴께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가 임하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아라. 평생 먹을 것을 기대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일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 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굉장한
도전이 되는 표현이죠. 저는 주님의 기도가 그렇게
어려운 기도인지 몰랐어요. 우리가 늘 외워서 하는
기도. 그 기도는 정말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주님의
진정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드려져야될 기도인거죠.
야베스의 기도를 폄하하고 싶진 않지만, 야베스의 기도가
사랑받기 보다 정말 주님의 기도가 사랑받게 되기를
바라고, 주님과 함께 이런 진정한 기도를 이 땅의 샬롬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되기를 이제 그렇게 헌신하는 마음을
좀 더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 고아와 같은
마음들을 갖고 있어서 자연히 경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애요. 하지만, 경쟁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져있고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에 대해서
주님은 우리를 서로 사랑의 자리로 초청해주신 거잖아요.
근데, 그 경쟁을 competition이라는 단어로 우리 알고 있는데,
발음이 약간 비슷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신
그 마음은 compassion인데, 우리가compassion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보면 com 은 with
함께 한다는 뜻을 갖고 있고, passion은 suffering인데요.
suffer with 함께 고통받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compassion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서 12장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그런 정말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그런 마음으로 이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compassion이죠. 그런데 우리가compassion을
갖고 살 때도 있죠.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면서 이competition에 의해서 사실
움직여지고, 그렇게 끌려가고 결국 우리도 competition의
마음으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기가 참 쉽다는 것.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현재 모든 세계는 치열한 경쟁 관계고, 국가와
국가 간에도, 민족과 민족 간에도, 그리고 한 민족 안에서도
이념 사이에, 그리고, 어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
그리고 더 작게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그리고 가정
안에서도 계속 competition이 있는 거잖아요. 심지어 아이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관계에서도 얼마나 competition이
많이 있어요? 근데, 그런 competition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아들
딸이라는 생각이 있기 보다는 우리가 너무나 뭔가 갈증,
채워지지 않은 마치 고아와 같은 심정을 갖고 있어서
자꾸 더 갖고 싶어하고 이기고 싶어하고 경쟁하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가 한편 치열한 경쟁 사회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르게 살아가야지만,
정말 하나님의 샬롬, 조화를 위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도전,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은 어둠을 많이 갖고 있죠. 때로는
어떤 사람들은 경쟁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고 표현하기까지
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세계, 자연의 세계를
우선 다시 한번 돌아보면 자연의 세계가 경쟁을 통해서
발전하는 것일까 하면 정말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있는 모든 초목들이 경쟁자가 더 많아서 더 잘 자라는
걸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혼자 벌판에 홀로 떨어진
씨앗도 잘 자라요. 경쟁자가 많든 적든, 상황이 좋든
나쁘든, 사실 초목들은 정말 자기 자신이 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멋있게 자라나요. 그런데, 그것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나게 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생명의 힘이라구요. 그 생명력이
그들 자신이 되게 하는 것이지,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그들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라는 것. 오히려 우리의
인생은, 경쟁 사회는 굉장히 비교 중심이잖아요. 모든
것을 비교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 보게 하는 것인데요. 근데 비교는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진정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고
자꾸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고 자꾸 평가하고 판단하고
또 판단받고 그래서 상처를 주고 받고, 그래서 가정
안에서도 얼마나 부조화를 만들어내는지. 아마 어려서
성장할 때, 가정에서 비교당하면서 자라신 분이 있다면
얼마나 그게 아픈 것인지 알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면서 살았다면
얼마나 그게 싫은 것인지. 우린 비교당하고 싶지 않으거죠.
하나님은 어느 생명도, 우리 어느 누구도 비교하지
않으시는데, 모두가 존귀한데, 우리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자꾸 비교되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며 관계들을
파괴해왔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경쟁은 참 결과 중심이라서 성과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다보니까 자꾸 성과, 결과에 목매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compassion은
정말 결과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데요. 우리 예수님의
삶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이런 가정을 해보죠. 오늘로
말하면 어느 언론의 인터뷰 기자가 예수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면서
얻은 결과가 뭐가 있냐고’. 그때 예수님께서 아마
보고하실 수 있는 결과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 나를
따랐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고, 나를 따르던 제자들도
다 떠나고 없다고. 그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줄
수 있는 결과는 제로, 0 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을 맞이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
하셨어요. 도대체 뭘 이루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루어낸 게 도대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부르심, 그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내가 이 땅에서 걸어가야 될
걸음을 끝까지 성실하게 걸었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내가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결과가 있어서 이룬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한 나의 걸음에 신실했다는 점에서, 나의 마음의 동기와
그 과정을 변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 이룬거죠.
결과가 있어서 다 이룬 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너무
결과에 의해서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거죠.
저는 이제 그 선교사들을,
선교 단체도 보내고 교회도 파송하잖아요? 그러면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이제 후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사역하는데,
근데 정기적으로 선교 보고를 해야되죠. 근데, 후원
교회에서는 어떤 보고를 받고 싶어할까요? 좋은 결과를
보고 싶어하는 거죠. 그러니, 이제 대개 선교 보고를
써야 되는데, 결과가 없으면 선교사들은 불안해져요.
그래서 자연히 때로는 후원이 끊길까봐 과장 보고의
유혹을 받게 되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현지인 서로
끌어당기기 선교사들 사이에 경쟁도 생겨나게 되는거죠.
근데, 선교 본부나 파송 교회가 현장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에게
결과 보고를 기대하지 말고 그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갈 때 그 순수한 초심, 그 마음의 동기가 혹 바뀌어지지
않도록, 그들이 선교지에 가서 혹시 잘못된 어떤 관계를
만들어서 empire builder가 혹 되지는 않도록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도와주고 그들이 결과를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을 support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선교사들도 그런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그냥 내가 이 땅에서 걸어야 될 그 걸음에만 신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은 어떤 선교사가 한 민족
가운데 가서 십 년 이십 년 동안 살다가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한 사람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쩌면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거기 복음의 싹이 트고 나중에 교회가 세워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있을 때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의 관계들을
무너뜨리는 것인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경쟁 사회는
굉장히 성공 스토리를 보고 싶어 하잖아요? 성공 스토리가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오르죠. 그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도전도 받고 또 격려
받고, 동기 부여도 돼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기도
하죠. 꿈을 갖게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런 성공 스토리를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실 그렇게 될 수 없다’라는
사실 때문에 더 낙심하고 절망하는 사람들도 사실 있어요.
그런데, 교회들도 보면 교회의 간증 집회나 무대 위에
대개 성공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오르죠. 좋은
결과를 가진 사람들이죠. 물론 귀한 믿음과 헌신을
따라 살다가 결국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무대 위에 올라서 많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도전도
하고 또 꿈도 주고 변화의 계기도 많이 만들어줍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 교회의 올라오는 성공 스토리들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 낙심과 아픔을 가져다주기도
해요. 근데, 한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무대 위에 올릴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리신
적이 있었나요? 예수님과 관련된 에피소드 중에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라는 자리 다툼이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누구를 세우셨냐면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셨어요. 너희도 이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하셨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이
위에 있는 사람, 성공한 사람, 뭔가 더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제자들의 눈이 오히려 어린
아이에게 가고 또 그 당시에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 기억하고 싶습니다.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의 의미'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구약을 읽어가다보면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up and down 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up and down 을 가만히 돌아보면 가장 두드러진up and down은 어떤 제도의 변화였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때 우리가 알듯이 그 백성들에게는 왕도 없었고 사실 군대도 없었죠. 사사시대까지는 왕도 군대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섰을 때는 하나님 안에서 샬롬을 누린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놓치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문제가 생기면 다른 민족들의 침략을 받아서 이제 고통을 겪었죠. 그러나, 다시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우셔서 다시 이제 그들을 회복시켜준 그런 계속 반복되는 스토리가 사사시대의 이야긴데요. 그러나, 그때 사사기까지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되심을 아주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그런 시기였음을 우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사사시대는 어쩌면 무정부상태였어요. 정부 조직이 없는 거예요. 열 두 지파들의 느슨한 연합체였잖아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열 두 지파 대표들이 그때 와서 함께 의견을 나눠야되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이 잘 같이 하나되기 어려운 시대였어요. 우두머리가 없는 시대, 그리고 군대도 없어서 자신들을 방어할 어떤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시대였죠. 그래서, 때로는 왕이 없었으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으로 혼란하고 무질서스러운 시대였지만, 사사시대를 말하는 성경의 표현은 그들이 왕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문제를 겪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언제나 그분의 통치 아래서 안전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만나면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찾아오죠. ‘우리도 다른 민족들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그렇게 요청합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말하죠. ‘이 백성이 왕을 세워달라는 것은 나를 버려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사실 그 때 어느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 버린다고 생각했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좀 안전장치를 갖고 싶다는 거죠. 다른 민족들은 왕도 있고 군대도 있고 조직이 잘 정비되어있는데, 이거 우리는 아무 그런게 없으니까 너무 불안하다는 거죠. 그러니 계속 주변 민족들한테 당했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한거죠. 하도 고집을 부리니까 하나님이 이제 경고하시면서 세워주시죠. 너희가 왕을 세우게 되면 어떤 결과가 있을 줄 아느냐고. 왕을 세우면 그 왕이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신하로, 너희 딸들은 데려다가 시녀로 부리게 될 거다. 그리고 너희가 땀흘려서 밭에서 얻은 소산들을 세금으로 거둬다가 왕과 주변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너희는 가난해질텐데 그때 가서는 나에게 울부짖어도 내가 들어주지 않겠다 하시죠. 그러면서도 고집은 꺾지 않고 결국 세워지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고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는 하나님의 design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람들의 그 고집스러운 의견을 하나님이 한번 그래 겪어보라고 해서 허락해주신 거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처럼 이스라엘의 사사시대까지와 그 이후 시대는 굉장히 많이 달라졌는데요, 가장 달라진 두드러진 것은 바로 이런 sharing과 관련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당시에 광야를 살아갈 때나 또 사사기를 살아갈 때는 그들 가운데 리더가 있었어도 리더들에게 어떤 특권도 없었어요. 모세나 혹은 여호수아나 갈렙이나 혹은 사사들이 더 좋은 음식을 먹거나 더 좋은 천막에 거하거나 더 특별한 특혜를 가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어떤 특별한 시기에 부르심을 따라 사역했을 뿐이었던 거죠. 특별히 우리가 광야를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을 읽어보면 그런 사건을 하나 알고 있죠. 열 두 정탐꾼을 보내고 정탐 보고를 듣는데, 열 사람이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자연히 그 보고를 들은 백성 전체가 불안해하면서 나중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죠. 그래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사십 년의 광야길을 걷게 하는 징계를 내리셨는데, 근데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보고를 했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도 사실 사십 년의 광야길을 같이 가게 하신 거죠. 근데, 오늘을 사는 우리 현대인들 같으면 그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애요.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면, ‘하나님, 우리 둘은 먼저 들어가게 하시고, 나머지만 사십 년 돌리시지. 왜 우리까지 사십 년을 돌아야 됩니까?’ 그렇게 질문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잖아요. 왜 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을 각각 개인 개인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떤 한 body의 지체로 본거죠. 운명 공동체로 본 거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무엇이든지 함께 share하고 그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함께 share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함께 기쁨과 아픔을 나누던 이스라엘 백성이 왕정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왕과 왕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특혜를 받게 되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고통받고 소외된 백성들이 생겨나게 된 거죠. 전에는 리더는 더 전쟁의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었다면, 나중에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지만 특권층들은 안전할 수 있는 그런 시대로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떤 리더쉽의 차이도 보면 사사 시대의 리더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리더들이었어요. 하지만 왕정 시대의 왕들은 하나님께 귀가 먹은 것처럼 오히려 왕과 왕 주변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계속 도전을 받게 된 거죠. 그래서 사사 시대와 왕정 시대의 차이는 하나님의 주도 아래서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겉보기에는 제도가 더 정비되고 안전장치를 가진 국가 체제를 가졌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의 뜻과는 멀어진 시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 그런데, 그것을 우리 신약 시대 교회사의 역사에서 좀 보고 싶은데요. 예수님의 공동체,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한 공동체에 누가 특권을 가졌겠어요? 모두가 함께 어떤 것이든 함께 share하는 모임이었죠. 예수님께서 더 나은 잠자리를 가지신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초대 교회의 이야기들을 우리 읽어보면 그때 초대 교회 성도들은 때로 심지어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이 모든 것을 함께 공유했던 그런 공동체까지 이루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삶의 축복과 아픔들을 다 잘 나눌 수 있었던 거죠. 그러던 이스라엘이, 그런 교회가, 하지만 교회 역사속에서 크게 바뀌게 되는데, 바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변화였어요.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될 때, 그것은 한편 고난과 박해 속에서 기도하던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된 거죠. 황제로부터 로마의 모든 시민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니까 기독교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곳에서 예배가 되어지게 됐으니까,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게 됐으니까, 황제부터 모든 로마의 시민들이 세례를 받았으니까, 이제는 정말 기독교의 승리로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한편 정말 교회가 많이 바꼈어요. 전에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의 교회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고난받고 박해받던 교회였는데,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니까 황제의 특혜와 사랑을 받는, 총애를 받는 기독교가 된 것이고, 자연히 더 고난을 앞서 받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로마의 특권층과 귀족들이 되게 된거죠. 그래서, 로마의 시스템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로마에도 황제로부터 귀족 계급이, 수직적인 계급이 있었던 것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도입되어서 교회 안에도 교황 제도와 그런 제도들이 생겨나게 된 거죠. 전에는 건물도 없이 가정에서 주로 모였던 교회가 이제는 거대한 성전 건물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교회는 부유한 교회가 된 거죠. 한편 교회는 성공한 것 같았고 로마를 정복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하나 완전히 무너진 것이 있었다면 그리스도 인들 사이에 sharing이 이제 더이상 가능해지지 않게 된 거죠.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가게 되면서 평평했던 곳이 이제 높은 산과 골짜기가 세워지게 된 것처럼 다시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나눔의 관계는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귀족 계급과 천민 계급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수직적인 교회들을 만들게 된 것이고 이제는 더이상 함께 삶의 기쁨과 아픔을 나눌 수 없게 된 교회가 된 것이죠. 그런 점에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인가요? 아니면 기독교가 로마에게 삼켜진 것인가요? 한편으로 로마는 기독교라는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기독교라는 무늬를 완전히 갖게 됐지만, 그러나 로마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시스템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꿈은 그대로 있었고, 로마의 영광도 그대로 있었던 거죠. 하지만, 교회가 많이 달라졌어요. 교회는 한편 기독교를 로마에 전한 어떤 승리의 기쁨을 갖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시스템은 로마의 것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교회가 정말 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정복하게 된 거죠. 그래서 그 이후에 우리는 교회의 역사를 보면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주변 민족들을 약탈한 사건들,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는 다른 정말 어리석은 죄악들을 저지르게 된 Christendom, 그리스도와 세상 왕국이 통합된 모델의 어둠을 극명하게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샬롬이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것을 우리가 그런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서도 한번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애요.
Upside down kingdom이 된 거죠. 하나님의 나라는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다시 upside down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는 관계에 있고, 조화에 있고, 그것은 sharing 에 있다는 것을 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 거기에 있는 거 같애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라는 것을 놓칠 때, 우리에게 어떤 불안함과 두려움이 찾아올 때, 자연히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안전장치들이 더 좋아보이고 그것이 나를 보호해줄 것 같고 나를 더 지켜줄 것 같으니까 그런 것들을 유혹으로 찾아가게 되고 선택하게 되는 거죠. 그런 것처럼 역사적으로도 교회도 언제나 교회는 역사 속에서 약하고 작았었지만, 그러나 주변 세상 속에 있을 때,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너희는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우지 말고 섞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과연 세상 속에서 다르게 살아갈 가능성이 사실 너무나 없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거죠. 동일하게 교회도 우리가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지만, 정말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일까. 오늘의 우리의 교회들은 우리의 교회가 정말 세상을 바꿔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 있는 것들이 교회를 변화시켜가는 것일까. 그 질문 앞에 우리가 고민하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어지기보다 세상에 의해서 바뀌어지는것이 더 많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거 같애요. 이 바벨탑을 세우게 된 인간의 역사는 여전히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흔들려왔고 또 교회의 역사 속에서 크리스챤들이 세상 속에서 흔들려 왔던 것처럼 우리도 계속적으로 흔들리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의 뜻을 어긋나게 된다는 것, 그것을 계속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원하지 않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교회 안에서도 수직적인 시스템이 생겨나게 되기 쉽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를 주고 받게 되고, 교회 안에서도 우리가 방어와 공격의 무기를 만드는 경향들이 생겨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딨을까, 정말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샬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이제 돌아보게 되는 거죠.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Need와
greed의 차이가 뭘까요?
Need에 대해서 여기까지가
need라고 누가 규정할 수 있을까요? 사실 구별하기 참 어렵다고요.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need가
‘나는 이것까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나는 그 더이상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
need와
greed를 구별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냐하면, 예를 들어서 큰 재난과 기근이 있어서 어느 지역에 한 달 이상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는데,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거기에 구호물자가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대여섯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이 던져졌어요. 그런데, 그 빵 한 조각은 한 사람의 굶주린 배를 채울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한 거죠. 근데, 그 사람이, 첫번째 그 빵을 손에 쥔 사람이 그 빵을 자기 입 속에 다 넣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need를 채운 건가요?
Greedy 해진 건가요? 예,
greedy 한거죠.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왜냐하면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완전히 실종된 것이니까요. Need와 greed의 차이는 관계 문제라는 것. 예를 들어서, 큰 풍년이 일어나서 마을 사람 모두가 배터지게 먹었다고 그 사람들더러 greedy하다 하지 않거든요. 그거는 하늘이 준 축복을 다 모두가 함께 나눈 것이니까. 그런데, 아무리 가진 게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만의 것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면, 아무리 나의 need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해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greedy하게 만든 것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훨씬 더 어떤 필요가 무엇이냐를 보기보다 우리의 언제나 함께 있는 관계들을 보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우리 속해있는 믿음의 공동체들, 교회를 생각해볼 때도, 아니면 더 작은 우리 가정을 생각해볼 때도 가정 안에서 sharing이 충분히 일어날 때 그 가정은 조화롭고 행복할 수 있지만, sharing에 문제가 생기면 사실 가정도 아프고 정말 상처가 많은 곳이 되잖아요. 우리가 성경에서도 보지만, 그 이삭과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었지만, 편애 때문에 결국 원수 만들고 말잖아요. 또 야곱도 열 두 아들이나 있었지만, 결국 요셉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다 보니까, 그것이 결국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그런 아픔을 겪게 된 것이고요. 아무리 한 가정이라 하더라도 가정 안에 있는 축복과 아픔을 잘 share하지 않게 되면 서로 결국 상처를 주고 받게 되기 쉽고 샬롬은 더이상 있지 않게 된다는 것. 샬롬은 정말 sharing에 있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저희 가정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은데요. 저희는 아이가 다섯인데, 그중에 저희는 넷을 입양해서 양육했는데, 처음에 저희는 한 아이만 낳고 하나만 입양해서 키우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갓난아이를 입양해서 남매를 키우다가 군포 공단 지역에서 소외층 사역을 하다가 공부방에서 만난 초등학교 다니는 세 아이를 알게 됬어요. 부모가 없고 할머니가 양육하는 아이들이었는데, 할머니까지 건강이 좋지 않게 되고, 위암 수술을 받으셨지만 의사는 일년 밖에는 더 사실 수 없다고 해서 그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 저희도 걱정하게 됬고 그것이 계기가 되서
93년도에 세 아이를 더 입양하게 됬었어요. 그 때 그 세 아이는
5학년,
4학년,
3학년이었고, 저희가 낳은 아이가 2학년, 그리고 밑에 세 살 밑에 막내, 그렇게 다섯을 키워오게 됐는데요. 그런데, 저희 다섯 아이들이 한 가족이 될 수 있는 게 뭘까. 사실 만약에 어떤 핏줄이나 특별한 인연 관계를 생각한다면 우리 위의 세 아이는 한 집안 아이들이라 남다른 친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었어요. 근데, 그 세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이 밑에 있는 두 아이에게는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했어요. 왜냐하면 아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셋이서 편드는 거는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그럼 밑에 두 아이는 한 솥밥 먹고 컸으니 둘이서 편들죠. 그런 갈등 관계를 해결하는게 초기에는 참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사실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또 기라성같은 응원부대가 있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등등. 그리고 위의 세 아이에게는 할머니가 또 계시다면, 막내는 저희가 입양 기관을 통하여 갓난아이 때 데려왔으니 아무런 응원부대가 없는거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만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싶을 때 분명히 저희가 낳은 아이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며 그 사람들이 선물을 얘한테만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있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세 아이의 할머니는 세 아이에게만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 가만 나눈다면 우리 다섯 아이는 한 가족 되기가 정말 어려울 거예요. 근데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선택은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아이들을 입양해서 우리의 자녀를 삼기로 언약을 맺고 약속을 했기에 모두에게 우선 감정적으로는 다 같지 않더라도 정말 공평해야될 이유가 있었다면, 그 공평을 주변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어요. 그래서, 주변에 있는 친척들이 선물을 준비한다고 하면 꼭 다섯 개씩, 그래서 모두에게 같이 나누어주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큰 아이들의 할머니가 굉장히 아프실 때 아이들 셋은 할머니에 대한 걱정을 갖고 있죠. 그러나, 밑에 있는 두 아이는 내 할머니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가정예배를 드릴 때, 밑에 있는 두 꼬마 아이들이 위에 있는 아이들의 할머니를 건강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그 아이들이 입술로 그런 기도를 하게 될 때, 그 때 자연히 아이들은 이제 우리가 각각 남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에게 있는 축복들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아픔도 우리가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기 시작하고 배우게 되는 거죠. 그래서 감사하게도 어려운 시간들, 사건들, 에피소드들은 많았었지만, 다 잘 커서 지금은 장성해서 첫째랑 셋째는 결혼도 하고 딸들도 하나씩 낳아서 저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됬고, 막내는 대학 3학년 들어가요.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우리는 함께 가정을 이루면서도 정말 샬롬이라는 것이 어떻게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정한 조화, 샬롬은 우리의 삶의 나눔에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의 기쁨과 아픔을 충분히
sharing할 때 있는 것이지, 조금이라도 설사 피를 같이 나눈 관계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나의 것을 지키고 나만이 누리려고 할 때 그것은 설사 그게 나의
need라 하더라도 그건
greedy하게 되는 것이고 관계들이 부서져 가게 된다는 것.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의 샬롬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라는 울타리가 점점더 넓어져갈 필요가 있는 것이겠죠. 예수님께서 평화를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도 말씀하시고 주심을 선포하기도 하셨지만, 또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온 줄로 생각지 말라’. 뭘 주러 오셨다 했어요?
‘검을 주러 왔다’. 샬롬을 주러 오시지 않고 검을 주러 오셨다 했어요. 그런데, 그 때 그 검을 어디다 사용하시겠다 했어요? 그 검으로 모든 가족 관계를 부수겠다고 하셨어요. 그렇잖아요. 아비와 자식이, 형제와 형제가 원수되게 하시겠다고. 도대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일까요? 그 말씀도 이
sharing의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사실 우리의 모든 가족, 가정, 우리는 사랑하지만,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거고, 어쩌면 이기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민족 이기주의도 다 있는 거죠. 모든 민족과 국가도 사실 이기적이죠. 세상에 이타적인 민족이 어딨겠어요? 이타적인 국가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리고 이타적인 가정이 정말 있을까요? 우리는 태생적으로 팔이 안으로 굽는 사랑을 갖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기적일 수 밖에 없기에 우리의
sharing은 때로는 배타적인
sharing이고, 우리는 그래서
defensive하게 되고, 자연히 더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competitive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꾸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니까 정말 하나님의 샬롬은 이 땅에 참 오는 게 자꾸 미뤄지고 부서져 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그런 도전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그 관계를 넘어선 관계로 우리를 초청하는 거겠죠. 우리가 절대적으로 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관계보다 우선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은 우리의 울타리가 더 넓혀져서 우리의 사랑이 흘러가게 되는 것. 근데 제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타율적인 분배예요. 절대로 하나님은 이 땅에 샬롬을 가져오시고자 하시지만, 타율적인 분배를 명령하신 적도 없고 그것을 기대하신 적도 없다는 것. 저는 저희 아이들 얘기했지만, 때로 초기에 위의 세 아이가 덩치도 더 컸지만 세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을 깨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언뜻 생각해보면 그 세 아이가 가진 친밀감과 결속력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 세 아이가 입양될 때 각각 다른 가정으로 입양됐다면 그 아이들은 얼마나 사실은 불행한 아이들일까요? 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인데, 그래서 한 형제가 됐는데, 그 아이들이 한 가정에 같이 들어오게 된 건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축복이잖아요. 근데 문제는 그 축복은 하늘이 주신 것인데 그 축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때 문제가 되는 거겠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라는 말 많이 하잖아요? 근데, 통로는 뭐가 쌓여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통로에 뭐가 쌓여있으면 문제쟎아요. 통로는 지나가게 하는 거죠.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게 할 때 축복의 통로겠죠. 우리 큰 아이들에게 있는 그 소중한 친밀감과 결속력이 동생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전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과제지, 그것을 뺏어서 갈라놓는 게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 그래서, 샬롬은 참 늦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대하기는 ‘하나님, 이 세상에 있는 것 모두 다 모아서 딱딱 갈라서 쫙쫙 나눠주면 참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주님은 단 한 번도 그런 아이디어를 말씀하신 적도 없고 지시하신 적도 없죠.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 안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저절로 이제 우리가 선택해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
계속 잠깐 남아있는 부분들을 좀 다루고 싶은데요. 하나님은 샬롬을 위해서 계속 일해오신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참 많이 보죠. 제가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이 갈라져서 이산 가족이 된 얘기를 잠깐 언급하게 됐었는데, 근데 어떻게 그 형제 관계가 다시 회복되게 되었나 한번 보면요, 사실 이 이산 가족이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어요. 왜냐하면 요셉의 부모, 야곱과 요셉의 어머니는 그 큰 아들들이 요셉의 옷에다 짐승 피 묻혀 와가지고 요셉이 이렇게 됐다 했으니 그 때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겠지만, 어떻합니까 죽은 자식, 세월이 지나가면서 잊어갔겠죠. 이집트에 있다고는 상상을 할 수가 없으니깐요. 형들, 요셉 미워서 팔았는데, 왜 찾겠습니까? 그러니 요셉을 찾는 마음을 가진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담, 요셉. 요셉은 참 특이한 인물이었어요.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상처받은 마음으로 그 고향 그리워하면서 억울한 마음을 쏟으면서 울면서 지낼 것 같은데,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정말 신실한 사람으로 살아갔죠.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도, 한 품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라 거기서도 충성스러워요.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야 자유의 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이후를 생각해보면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되었는데, 총리 대신이 되면 우리 같으면 왕에게 좀 재가 얻어서 고국의 소식도 좀 들어보고 방문도 해볼만한데 실제로 보면 요셉은 거기서
9년이 지나도록 그냥 거기만 있어요. 그러고보면 요셉이라는 인물은 어쩌면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전혀 아니고 그냥 어디에 있든지 그 현실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인 거 같애요. 만약 그런 요셉이라면 어떻게 요셉과 요셉의 가족들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정말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듯이
7년 동안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의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거는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내리신건데, 하나님께서 왜 하필 이집트와 가나안에
7년 풍년과 흉년을 계획하셨을까요? 사실 이 흉년과 풍년 사건이 없었다면 이 가족들이 만날 가능성이 사실은 없었다고 보여져요. 우리가 알듯이 이집트에는 곡식이 잘 준비됐는데 가나안에 곡식이 다 떨어지고 나니까, 흉년
2년째에 가서 곡식이 이집트에는 많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아들들을 보내게 된 거잖아요. 그것이 계기가 되서 이제 요셉이 어느 날 그 총리 자리에 앉아있을 때, 멀리서 곡식을 찾아온 사람들을 보니 몰골이 형들인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의 섭리를 깨닫게 된 거죠. 어렸을 때의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이산 가족의 화해 상봉의 스토리는 누구 작품이예요? 정말 하나님 작품이라고요. 사람은 깨고 부수지만, 하나님은 주선하는 상봉의 자리를 주선하셔서 다시 화해와 회복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성경의 스토리들을 읽어보면 참 많이 있습니다. 다 나눌 순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는 이 땅에서 관계를 실패하고 깨고 결국 샬롬을 잃어버리지만, 하나님은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화해케 하시고, 회복되게 하셔서 정말 하늘의 샬롬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
‘샬롬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번 주먹을 한번 불끈 쥐어 보죠. 이 불끈 주먹, 우리가 어떤 때 불끈 주먹을 쥐죠? 불끈 주먹을 쥘 때 우리의 마음이 이 안에 담겨져 있는 거죠. 여러가지 생각과 마음이. 근데 한번 손을 펴보세요. 우리가 어떤 때 손을 펴나요? 근데, 이 불끈 쥔 주먹과 편 손에는 전혀 다른 대조된 것들이 담겨져 있는데요. 우선 우리가 상대방을 거절할 때 불끈 주먹을 쥐죠. 하지만 편 손은 상대방을
welcome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끈 주먹을 쥘 때는 내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조급함, 서두름이 있다면, 편 손은 잠잠히 기다리는 마음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은 이제는 이 주먹 밖에 없다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담고 있다면 편 손은 그래도 희망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은 나의 뜻을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담고 있다면 편 손은 섬기고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을 담고 있는 거죠. 그리고, 불끈 쥔 주먹은 상대방을 때릴 때, 상처를 줄 때 사용한다면 우리 언제 손 펴죠? 매 맞을 때 펴쟎아요. 근데, 이 불끈 쥔 주먹과 편 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먼저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불끈 쥔 주먹으로 다가오시는 게 아니라 편 손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허물과 죄 투성이지만 우리를
welcome 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결코 절망하지 않으시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시는 분이시지만, 사실은 아까 제가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때로는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해주시는 분이시고, 그분의 뜻을 고집스럽게 끌고 가는 분이 아니시라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맞으시는 분이시죠. 그 편 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샬롬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배울 수 있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도 동일한데요, 우리가 하나님께 불끈 쥔 주먹을 쥐고 갈 수 있겠죠. 때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 선대하시기보다는 나를 너무 힘들게 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하여 더이상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서 내 뜻을 이루려고 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계속 원망하는 마음으로 달려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때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몸부림일 수는 있어도 우리도 알듯이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됨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손을 펼 때겠죠. 하나님을 우리가 welcome 하고 그분에 대하여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기다릴 때,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을 때, 그리고 나의 뜻을 이루려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려고 할 때,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yes 하지 않고 no라고 응답하시는 그 매맞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편 손으로 그분을 만나고 다가갈 때, 우리가 진정 하늘의 샬롬을 얻게 된다는 것. 그것은 동일한 우리 인간 관계도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인간 관계는 서로 주먹을 쥐기가 참 쉬운 것 같애요. 우리가 서로를 환영하기 어려울 때가 참 많아지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조급해지기 쉽고,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제는 내려놓게 되고, 그리고 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하게 되고 상대방을 아프고 상처를 주게 될 때가 참 많은거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의 평화 그 샬롬을 이 땅에 전하고자 한다면 그 길은 우리의 쥐어져 있던 주먹을 펴는 길 밖에 없다는 것.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가 함께 있는 이들을 심지어 나를 아프게 하고 공격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welcome하는 마음으로 손을 펴고 그리고 결코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잠잠히 서로에게 기다려줄 수 있고, 사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리고 나의 뜻이 있지만, 오히려 상대방의 뜻을 꺾으려고 하기보다 섬겨주려는 마음을 갖고, 때로는 상대방 때문에 내가 아픔과 고통을 겪지만 그것을 묵묵히 인내로 받아들일 때, 그 때 우리는 정말 샬롬을 알고 또 이해하고 전하고 또 누리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고요. 우리의 관계는 contract가 되기 쉬운 거 같애요. 심지어 결혼 관계도 우리가 사랑의 언약을 맺지만, 상대방에게 달려있다는 거죠. 상대방이 잘해준다면 나도 잘해줄 수 있지. 하지만, 상대방이 전혀 잘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잘해줄 이유가 없다. 사실 그런 관계라면 인간 관계는 다 거래가 되고 말 것입니다. Contract를 맺은 거겠죠. 그러나 그 contract의 관계 속에 진정한 샬롬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어렵지만, 진정한 샬롬은 covenant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변함없는 사랑을 갖고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샬롬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처럼 여전히 우리도 이 땅에 진정 샬롬을 기대한다면 우리가 covenant의 마음을 갖고 서로의 관계들에 신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이제 마무리하는데요. 자연을 다시 한번 잠깐 엿보면서 생각해보고 싶어요. 우리에게 정말 주되신 그분의 통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Be under God’s control’로 살아가는 게 너무 중요한 거 같애요. 그리고 정말 ‘Be yourself’ 우리 스스로가 되는 게 너무 중요하다는 것.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나의 역할에 충실한 것. 그러면서도 ‘Be patient’ 우리 서로에게 정말 인내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샬롬, 자연의 세계에 있는 샬롬을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이룰 수 있고 그 샬롬이 우리를 통해서 세상 전체까지 확장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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